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2007년 출간됐으나 절판된 책 <행복한 과학>을 빌려 읽었다. 이달 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의 거점지구 선정을 앞두고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입지경쟁 홍보 전자우편과 모임 참석 요청이 잦아지는 때다. 경쟁은 치열한데 그 주장을 듣기엔 부담스럽다. 이미 이해관계에 예민한 사안이 됐고,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도 비평하길 꺼린다. 문득 말 많은 과학벨트 사업이 어떻게 태동했는지 다시 궁금해져 이 책을 펼쳤다. 과학벨트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른바 ‘은하도시’ 구상을 만나는데, 그것을 처음 제시한 ‘은하도시포럼’이라는 과학자단체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글과 함께 펴낸 책이다.
<행복한 과학>엔 이 땅의 과학기술인이라면 한번쯤 품어봤을 법한 행복한 과학기업도시의 청사진이 담겼다. 아시아 과학의 중심이 될 기초과학원과 거대 가속기가 건설되며, 세계 석학들이 몰려오고, 젊은 과학도는 일자리 걱정에서 해방된다. 첨단 의료시설로 암 걱정이 사라진다. 원천연구 발명품으로 비즈니스는 경쟁력의 날개를 단다. 연구소를 나서면 삶의 품격을 높이는 문화예술이 펼쳐지는 창조도시다. 지역엔 엄청난 경제부흥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도시의 주인공은 자긍심 높은 과학기술인이다.
유토피아 문학의 역사에서 보듯이, 이상향은 대개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뒤집어놓은 거울이다. 과학도시는 우리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하는 수많은 보통 과학기술인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사실 과학기술은 우리 경제의 압축성장을 일구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지금은 국제 연구지표에서 상위급으로 평가돼 국격을 높여준다. 그런데도 이에 걸맞은 사회 분위기는 없다. 기초과학을 홀대하는 이공계 기피는 어떤가? 정치와 정책에선 또 얼마나 비전문가의 손에 들러리가 되었던가? 과학기술은 경제성장의 도구로만 사용됐지, 자체의 지식전통과 문화가 제대로 향유된 적이 있던가?
그래서 과학자들은 좀더 과감한 방식으로 정계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은하도시포럼 과학자들은 과학벨트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로 ‘잃어버린 10년’을 끄집어냈다. “지난 10년간 현재의 과학기술 정책과 제도와 구조 속에서 정체해왔”기에 기초과학의 질적 도약을 위해 과학도시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편다. 또 “이명박 전 서울시장님도 우리와 같은 꿈을 꿔왔던 분입니다. … 국민적 지지를 얻는 방법과 우리의 목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라며 동행을 다짐한다. 동행은 포럼이 창설된 2006년부터 시작됐다.
책 출간 한달쯤 뒤 과학벨트는 한나라당의 주요 대선 공약이 됐다. 이듬해 대통령직 인수위에선 은하도시포럼 대표인 민동필 교수(현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가 태스크포스팀을 맡아 꿈을 정책으로 다듬었다. 다음해 국가과학기술위와 국무회의에서 종합계획과 특별법안이 일사천리로 의결돼 ‘과속 추진’ 논란을 빚었다. 더 노골적인 정치개입은 그 이후다. 행복한 과학은 행복도시 수정 논란에 동원됐고 최근엔 충청권 입지 공약 원점 재검토로 지역갈등마저 낳았다.
과학과 정치의 만남 자체가 부적절한 게 아니다. 그러나 정치에서 참여와 동의의 과정이 중요하다면, 그동안 과학벨트의 여정은 제대로 된 정치와 한참 거리가 멀었다. 왜 기초과학 축제마당에 이 땅 기초과학자들의 흥겨운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을까? 과학을 정치논리로 엮지 말라던 정부와 정책결정자는 오히려 과학벨트의 정치를 독점하지 않았던가? 이미 많은 길을 지났다. 이제라도 정치다운 정치가 필요하다. 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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