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정치부 선임기자
기득권 지키기에도움되는 일이라면
극우세력과도 쉽게한배를 타는 보수
극우세력과도 쉽게한배를 타는 보수
지난주 부산 부민동에 있는 이승만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쏟아부어졌다는 뉴스를 듣고 누가 그랬을까보다 대체 언제부터 동상이 거기에 있었는지가 솔직히 더 궁금했다. 페인트 세례야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한 누군가가 그랬겠지만, 이승만 동상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성난 민초들의 손에 의해 모두 끌어내려진 뒤 그동안 공개된 장소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아봤더니 부민동 동상은 지난 3월에 세워져 오는 20일 제막식을 앞두고 있었다. 부산 서구청(구청장 박극제)이 ‘임시수도 기념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10월에 발주했다. 당시 지역신문에만 짤막하게 보도된 탓에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허남식 부산시장이 최근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을 방문해 이승만기념관으로 바꿀 것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동상 건립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51년 만에 이승만 동상이 다시 등장한 것은 ‘이승만 영웅 만들기’가 어디까지 진행돼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부산은 6·25 전쟁 초 그가 수도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목포로 도망다니다가 결국 배로 남해를 가로질러 도착해 2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전쟁을 그곳에서 지휘한 게 공이라지만 군사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상태였다. 부산에서 그의 행적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게 있다면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야당 국회의원 50여명을 헌병을 동원해 연행한 정치파동(1952년 5월)이 단연 첫째다. 그럼에도 1979년 부마항쟁을 이끌어 광주와 함께 민주화 성지로 일컬어지는 부산이 그를 기린다고 나섰다. 이런 판이니 앞으로 다른 지자체가 본뜨고 나설지도 모른다.
1995년 <조선일보>가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이라는 기획 시리즈 기사와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특별기획전’이라는 전시회를 시작으로 이승만 복권을 시도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반응은 웬 시대착오적 여론몰이냐는 거였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지금 일부 보수신문의 주요 논객들이 <조선일보> 프로젝트의 충실한 전도사가 됐다. 이들은 심지어 4·19 세대더러 이승만을 끌어안으라고까지 요구하고 있다. 공영방송인 <한국방송>도 이승만 특집을 준비하는 등 장단을 맞추고 있다. 또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4·18 의거의 발생지인 고려대의 이기수 전 총장과,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과 혁명적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김문수 경기지사까지도 광화문광장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고 거들고 있다.
독재 끝에 국민의 손에 의해 쫓겨난 정치인을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우는 것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뒤 18년간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박정희를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데로 곧장 연결된다. 나아가 이승만-박정희 띄우기는 위로는 일제강점기, 아래로는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 대한 재평가 시도로도 이어진다. 일제로의 연결은 자칭 ‘새 보수’(뉴라이트)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한 바 있다.
전두환·노태우로의 연결은 199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영웅 만들기에 앞장섰던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 담당하고 있다. 그는 “군인 출신 세 대통령(박정희·전두환·노태우)들이 국가를 끌고 가던 시절 한국은 경제성장과 고른 분배 및 인권향상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극우 논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역한 과거에 대한 청산은커녕 자기반성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는 한국의 보수는 기득권 지키기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극우세력과도 쉽게 한배를 타기 때문이다. 시대 역행적이고 몰가치적인 독재자 복권 시도가 횡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의 비극이다.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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