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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칼럼] 천기를 누설하고 실천한 죄?

등록 2011-08-01 19:17수정 2018-05-11 16:15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지난 7월20일 대학 동아리 학술단체인 자본주의연구회의 1, 2대 회장을 지낸 최호현씨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진한)로부터 징역 5년, 지격정지 5년 구형을 받았다. ‘이적’ 표현물인 북한 경제 관련 자료를 노트북과 유에스비(USB)에 담아 소지했고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게 그나마 증거 있는 혐의 내용이다. 이성규 담당 검사도 스스로 내린 구형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증거는 없지만 피고의 “행태로 볼 때 이적단체, 반국가단체 조직, 결성의 개연성이 농후하다”고 덧붙여 무거운 법정의 방청객들이 실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살아 움직이는 방식에 관한 오랜 기억을 되살려준 그 실소는 지난 3월부터 진행된 자본주의연구회 회원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긴급체포, 그리고 이와 같은 기본권 침해를 정당화하려고 들씌운 무거운 혐의점들이 용두사미로 끝나곤 하는 ‘데자뷔’의 허망함으로 이어진다. 이 땅의 공안검찰과 경찰에게 세월은 가지 않는다. 북의 지령, 찬양, 고무, 이적단체 등 무시무시한 말들도, 체포, 압수수색을 당한 회원에게 그가 속한 단체 이름이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 붉은 기”(얼마나 ‘새 세대 청년’다운 발상인가!)라고 경찰이 가르쳐주는 모습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너무 식상한 탓일까, 거의 모든 매체가 최씨에 대한 구형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연구회’는 2005년 12월 ‘자본주의연구회 네트워크’를 모태로 출범했다. 최씨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연구회의 취지에 관해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나가서 부딪치자는 것”이며 “취업난에 개별화되고 있는 대학 사회에서 ‘학문하기 붐’이 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어쩌면 최씨와 회원들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누구나 알고 있는 ‘천기’를 누설한 혐의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를 알아야 주체적 자아로 살 수 있다고 주창하고 실천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는 자본뿐이라는 지배질서에 감히 맞선 혐의 말이다. 게다가 오늘의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 경쟁에서 일등을 빼앗길 수 없는 나라 아닌가.

온당한 검찰이라면 “자본주의연구회 자체는 대학생 동아리로서 아무 문제가 없는 단체”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어선 안 된다. 대안경제포럼을 열어 온 자본주의연구회가 각 나라의 경제정책을 연구한다면 우리 처지로서 북한 경제를 제외할 수 없고 북한 체제의 성격상 김일성, 김정일의 발언을 모르고는 북한 경제정책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 것이다. 또한 이번 사건을 통해 자본주의연구회의 활동을 위축시킬 개연성이 농후하다는 점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최호현씨가 소지한 북한 경제 관련 자료를 주된 증거로 삼아 5년 징역, 5년 자격정지를 구형하는 행태를 보면, 국가보안법의 궁극적 목표가 그렇듯이 우리 사회의 비판적 주체 형성을 가로막는 게 공안검찰과 경찰의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에게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안다면 자본주의를 알아야 주체적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배세력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까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희망버스를 가로막게 하는 자발적 복종의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초중고에 두루 있는 사회 과목에서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하는 자본주의에 관해 거의 공부하지 않는 게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까지.

누가 말했던가, 국가 이성 위에 법 이성이 있고 법 이성 위에 인간 이성이 있다고. 국가보안법이 국가 이성의 이름으로 법 이성을 일그러뜨린 증거라면, 자본주의연구회 사건은 그렇게 일그러진 토대 위에서 인간 이성이 모멸되고 억압당한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8월12일의 선고 공판에서 인간 이성을 존중하는 법 이성을 볼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바란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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