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10월6일, 오늘로 274일째다. 이젠 뉴스가 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리 외쳐도 응답이 없으니 제풀에 지쳐가는 것일까? 인터넷 신문을 포함한 언론에서 피로의 기색을 느끼는 건 나만의 일일까?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타워크레인에 오른 건 ‘구’문에 속하겠지만, 오늘로 274일째를 기록한다는 것은 ‘신’문에 속한다.
20년 전쯤 프랑스의 기자 두 명이 국제분쟁지역에서 납치되어 장기간 억류된 적이 있었다. 프랑스 공영방송은 그들이 풀려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로… 두 기자가 납치된 지 ×××일째입니다”라는 멘트를 하고 난 뒤 그날 뉴스를 시작했다. 이 멘트는 두 기자가 석방된 날 끝났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구성원을 잊지 않고 연대하겠다는, 그래서 사회를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데에 그들은 집요했다. 그것은 교육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라. 멘트는 억류자를 위한 것이지만 그걸 듣는 이는 억류자가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다. 가령 나는 <한겨레>가 신문 1면 상단에 “오늘로 김진숙씨가 타워크레인에 오른 지 274일째, 그를 지키는 정흥영, 박영제, 박성호씨가 오른 지 102일째 되는 날이다(이들과 함께 올랐던 신동순씨는 40일간의 단식 끝에 병원에 실려 갔다)”라는 식으로 독자에게 알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들이 살아 내려오는 날까지.
부산 영도의 조선소 근처에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가 매섭고 차가운 바닷바람으로 바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 나라는, 정부와 국회는 이대로 계속 무능한 채 별일 없이 태평할 것인가. 벌써 9개월을 넘겼다. 정말이지 김진숙을 살아 내려오게 할 방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인가. 더불어 살자고 절박하게 외치는 국민을, 사회구성원을, 노동자 인간을 보듬지 않는 국가와 사회는 그 무엇이며 기업은 또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진 자의 끝없는 탐욕, 이를 부정하고 맞서는 자는 다만 제압 대상일 뿐이라는 것인지, 이젠 20:80의 양극화를 넘어 1:99의 초양극화까지도 고분고분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가진 자의 탐욕에 맞서 싸우고 있다. 체제 순응적이었던 영국의 젊은이들이 집단 항쟁에 나섰고, 꿈쩍도 할 것 같지 않았던 아랍세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지금 진행중인 미국 젊은이들의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평등, 민주주의, 혁명”을, “99%와 1%의 싸움이다”, “금융권의 탐욕과 부패를 심판하라”를 3주째 외치는 그들은 시위 장소인 주코티 공원을 예전 이름인 리버티(자유) 공원으로 바꿔 부른다. 꼭 10년 전 알카에다가 겨냥했던 세계금융지배체제의 심장부를 이젠 미국의 젊은이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최근 10월호엔 “진보의 계륵, 약골 오바마”라는 글이 실려 있다. 오바마 스스로 ‘인질범’, 심지어 ‘납치범’이라고 부른 공화당에 오히려 끌려다닌 실상을 밝힌 글에서 필자는 정치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대통령은 탁월한 웅변가다. 그러나 그의 연설에는 늘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모든 문제를 야기한 악인이 없다. … 마치 타자의 불행에 원인이 없고 죄도 없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게 오바마가 회피하고 있는 악인이 누구인지 미국의 젊은이들은 분명히 지목한다. 월가라고.
신자유주의가 경쟁과 효율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가진 자의 탐욕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희망버스와 리버티 광장은 하나로 만난다. 희망버스가 외롭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다. 10월8일 토요일, 5차 희망버스가 떠난다. 부산영화제와 만나는 시기에 1543명의 영화인들이 “김진숙 지도위원과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김진숙에게 연대해야 하는 것은 그의 삶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서가 아니다. 그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노동자들도, 그 가족들도, 우리도 모두 다만 인간이기 때문이다. 집요하자. 즐겁게. 제풀에 지치지 말자. 희망은 희망이 부른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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