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아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피해자들도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술에 취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 뒤 가해자들이 말하는 ‘모범답안’이다. 술을 핑계로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몰랐던 일’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만든다. 그리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사죄한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계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지난주 현직 부장검사가 출입처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여기자들을 성추행한 사건이 터졌다. 두 여기자가 느꼈을 모욕감과 치욕스러움을 생각하니 분노가 활활 타오른다. 최아무개 부장검사 역시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만취해 잘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7년 전 나도 한 술자리에서 언어 폭력을 당하고 신체적 폭력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 술에 취한 가해자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쌍욕을 하며 나를 때리려 했다. 주변 사람들은 가해자의 폭력을 제지하고 나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사실 언어 폭력을 당하는 현장에서 당황한 나머지 가해자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아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술자리에서의 폭력만큼 내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은 다음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반응이다. 이튿날 나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연락해 자문을 구했다. 신기한 것은 남성과 여성의 반응이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말이 없거나 허허 웃으며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냥 불쌍하다고 생각해라” “술버릇 안 좋은 사람 건드리면 안 된다. 다음부터 조심해라”고 말했다. 반면 여성들은 “개××, 그냥 넘어가선 안 돼. 사과를 받아야 한다” “엄연히 폭력이다. 공론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처음에 나는 당사자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것조차 귀찮고 다 잊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여자 동료들 얘기를 듣고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고, 나는 그날 같은 자리에 있던 한 여성의 중재로 가해자에게 직접적인 사과를 받아냈다.
사과를 받은 뒤 한결 기분이 나아진 날 발견했다.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해준 선배에게 감사의 전화를 했더니, 그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 사과를 받는 건 널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야. 만약 그렇게 안 했다면 앞으로 넌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만 봐도 그때 그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행동하거나 방어적으로 된다고. 결국 너의 관계맺음에 문제가 생기는 거지. 그리고 너 말고 다른 피해자가 생길 경우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앞으로 그런 일 생기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꼭 여자 선배들과 상의해.”
그날 나는 그런 동료가 곁에 있어 든든했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왜 사회 곳곳에 여자들이 진출해야 하는지, 여자들이 왜 연대해야 하는지 몸소 깨달았다.
술자리에서의 각종 폭력은 술을 핑계로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문제가 터져도 주변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폭력을 용인하거나 ‘술김에 한 행동이니 괜히 긁어 부스럼 내지 마라’는 문화가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해당 여기자들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안 했다면, 모두 쉬쉬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폭력을 당해본 경험자로서 예비 피해자들에게 감히 조언한다. 혹시 모를 피해 상황을 가정해 당신이 어떻게 대처할지 미리 연습해보라. 쌍욕을 하든지, 같이 허벅지를 만져주든지 등등 피해자들도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도 피해 상황이 발생한다면? 여성 동료들과 먼저 상의하고 그들과 연대해 사과를 받아내고 대응책을 모색하라.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엄연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양선아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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