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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빵 터지는 대한민국 / 김현진

등록 2012-04-22 20:49

김현진 에세이스트
김현진 에세이스트
지금 대한민국에
예능인 아닌 사람이 있는가
예능감 있어야 취업도 한다는데…
텔레비전을 멀리하게 된 것은 내가 고상해서 바보상자 보면 바보 된다, 뭐 이런 게 아니라 텔레비전보다 사람들과 술 마시는 게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술 마신 건 고작 십년이다. 그런데 오년 전부터 사람들과 술 마시는 게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음주 인생의 절반을 재미없게 보낸 셈이다. 게다가 끊으려고 애를 쓰는 중이니 날린 시간의 까닭이 너무나 궁금하고 아깝기 마련이다. 내가 교만해져서인지, 사람들이 재미없어져서인지 고뇌하다가 까닭을 밝혀냈다. 어머니가 무심코 텔레비전을 틀어 놓은 옆을 지나가다가, 이 예능프로그램들이 바로 문제라고 무릎을 쳤다. 거기 나온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하던 거랑 똑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재미없는 술자리라고 느꼈던 건 실패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셈이다.

술자리 참여자들이 프로그램 출연자가 되어 다 똑같이 따라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태도의 문제였다. 장소 세팅부터 메뉴 선정에서 화제 이끌어가기까지 어떤 공통된 강박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시청률, 즉 흥행에 대한 강박인 셈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빵빵 터뜨려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렇게 빵빵 터뜨리려다 터뜨리지 못한 사람에 대한 조롱과 무시, 이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술자리가 나는 항상 불편했다. 하지만 빵빵 잘 터지는 술자리일수록 시청률 터뜨린 술자리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도무지 남을 빵빵 터뜨리지도 못하고 남 이야기에 빵빵 터지지도 못하고 땡글땡글한 눈으로 게스트의 이야기를 듣는 중앙집중형도 못 되는 나에게 부족한 건 바로 ‘예능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혀를 차며 이게 자리잡은 지가 언젠데 네가 인제 이걸 탓하고 있니 하시던데, 어머니가 대표 프로그램을 말씀하시며 예능 프로그램이 자리잡은 게 언제 언제고 설명해 주신 시기를 꼽아 보니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한 시기와 딱 맞아떨어졌다. 원래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걸 싫어해서 술자리에서 게임만 하지 않으면 좋다고 여겼는데, 그런 사소한 게 문제가 아니라 술자리의 거대한 프레임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예능감 폭풍은 술자리만 습격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평소 사장님과 친하게 지내는 카페 열쇠를 받아 일찍 문을 열었는데, 활짝 웃으며 누군가 들어왔다가 바람같이 해맑게 웃으며 유인물을 놓고 사라졌다. 국회의원 강용석이었다. 싫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소금 뿌릴 수도 없고 사장님께 강용석이 왔었어요 하자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냐 하시길래 정치인은 아닌 것 같고 예능인? 하다 생각해 보니 강용석만 그런가, 누구는 예능인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 대한민국에 예능인 아닌 사람이 있는가. 요즘에는 취업하려면 에스엔에스(SNS) 넣는 건 기본이고 동영상에 나 이만큼 예능감 있는 사람인지 보여줘야 한단다. 그래서 예능감이 뭐냐 하면, 빵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논문 표절을 했건 성추행 전력이 있건 아버지가 독재를 했건 빵 터뜨리면 된다. 착한 에프티에이(FTA) 나쁜 에프티에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대강 시간 끌다 빵 터뜨리면 다 한방에 해결될 일이다. 폰카 달린 스마트폰을 다들 들고 다니니 일반인도 빵 터뜨리기 쉽다. ××녀 만드는 게 그중 제일 간단해 많이들 써먹는다. 안 유명한 사람은 투표 인증샷, 유명한 사람은 투표율 얼마가 넘으면 내가 뭘 하겠다 공약, 이게 재미없었던 게 내가 예능감이 없어서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 예능감 폭풍은 앞으로도 한동안 사그라질 것 같지가 않다. 아마도 빵 터지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분위기가 사그라지기 전에는 예능감 폭풍도 건재할 것 같다. 슬프게도 빵과 뻥은 점 하나 차이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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