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자유기고가
해외의 역사가 오랜 대학에는 저마다 독특한 학생자치의 기풍이 존재한다. 미국·유럽·일본의 여러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치권을 보장받는다. 등록금 문제, 총장선출제, 학내 구조조정 문제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서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발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해 런던에서의 학생봉기처럼 결정적인 국면에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견제하기도 했다. 그러한 학생참여의 배후에는 학생자치의 전통, 학생들의 풀뿌리 조직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극적인 ‘스튜던트 파워’를 보편적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지난해 반값 등록금 시위도 한풀 꺾였고 그것을 뒷받침했던 전국적 학생비상총회 역시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학교 구조조정 문제 역시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학생들은 무력하다. 이렇듯 언제나 대학생들이 선두에 서서 이슈를 주도하고 정치적 지형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과거의 학생운동은 그러한 대학생들에 대한 역할기대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것을 당연시할 때 학생운동에 대한 실망은 대학생 전체에 대한 실망, 나아가 청년 전체에 대한 손쉬운 실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실망은 사실 뿌리 깊은 것이다. 뭔가 잘 안될 때 청년을 탓하는 관행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 학생운동이 극적으로 불붙었던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의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한데 그에 대한 실망 역시 거듭되었다. 손쉬운 실망감은 모종의 조급증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런 조급증은 학생자치의 전통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을 급박한 정치적 상황에 동원해야 할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 조급증이 학생운동에서 극단적인 정념과 관념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손쉬운 전향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도한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동요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학생자치의 이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넓게 보면 학생자치는 작은 부분에서라도 학생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공간과 조직을 의미 있게 운영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경험이 보편화되어야만 학생들이 야권연대와 같은 공허한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적 전망과 행동을 관철시킬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경험이 뒷받침되어야만 학생들이 의회정당의 표밭으로 전락하지 않고 대학 구조조정 문제, 등록금 문제에 관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학생자치의 활성화야말로 올바른 ‘학생운동’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오랫동안 학생운동을 경험해본 사람들에게 학생자치의 아마추어리즘을 깔보는 것은 쉽다. 정치적 문제를 등한시하고 자족적인 자치활동에 매몰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일부 좌파들이 근대적 시민권을 깔보는 것과 유사하다. 대학, 길드, 자치도시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데서 발생한 부르주아적 시민권은 언뜻 보기에 일상에 매몰된 자기만족적 권리로 보이지만, 바로 그러한 자족성이 그 기원에서 국가와 자본의 간섭에 대한 봉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인 저항도 이면에서는 그러한 근대적 시민권에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같은 것을 학생자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학생들의 자치가 다소나마 자족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러한 자족적인 영역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위협받을 때, 그것이야말로 확실한 봉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박가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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