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첫 순회 경선의 열기는 뜨거웠다. 지난 25일 제주시 한라체육관은 후보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지지자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모인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축제 분위기였다.
네 후보는 저녁 8시 개표를 앞두고 기자석을 돌며 인사를 했다. 문재인 후보의 얼굴은 차분했다. 손학규 후보는 자신감이 넘쳤다. 김두관 후보는 약간 초조한 기색이었다. 정세균 후보는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았다. 개표 뒤의 표정은 달랐다. 문재인 후보의 웃음에는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다른 세 후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세 후보는 제주 경선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불복의 명분을 모바일 투표 결함에서 찾았다. 하지만 세 후보의 참모들은 “문재인이 민주당 후보가 되면 확실히 진다”거나 “박근혜가 웃고 있다”는 비아냥을 쏟아냈다. 결국 문재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돼야 한다는 얘기였다.
대선후보 선출 과정은 본래 사생결단의 싸움이다. 후보들은 누구나 자신의 정치 인생 전부를 건다. 추종하는 사람들도 신념과 이해가 뒤섞여 눈이 먼다. 자기 정당의 경쟁 후보를 다른 정당 후보보다 더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 경선에서 지고 난 뒤에는 본선에서 자기 정당 후보의 패배를 내심 기대하는 지경에 이른다.
민주당 경선 파행은 27일을 고비로 봉합 국면에 들어섰다. 모바일 투표의 오류는 치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점은 보강하기로 했다. 그래도 경선이 순항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1987년 대통령 5년 단임제 개헌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살펴보면 몇 가지 상식이 통용된다.
첫째, 무리한 가설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 1987년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이후 김대중 후보 쪽에선 ‘4자 필승론’이 나왔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로 표가 갈리면 결집력이 높은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는 가설이었다. 틀렸다. 분열하면 지는 것이 정상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제3후보 필승론’이 나왔다. 역시 틀렸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자신에 대한 거부감을 ‘디제이피(김대중-김종필) 연합’이라는 정치 기획으로 극복했다. 제3후보는 끝까지 출현하지 않았다.
둘째, 음모론은 진실이 아니다. 따라서 한계가 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선출되자 ‘디제이 음모론’이 나왔다. 진실은 호남 민심의 ‘선택’으로 보는 게 온당하다. 2007년 경선과 대선을 치르며 정동영 후보는 ‘호남 후보 필패론’에 시달렸다. 상대 후보가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제기한 네거티브였다. 하지만 그는 호남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집권 10년 동안의 양극화 심화 때문에 패배했다.
최근의 ‘친노(친노무현) 필패론’도 비슷하다. 만약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을 경우 그건 ‘친노’라서가 아니라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권자들이 ‘친노’의 복귀를 걱정한다면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인사들은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된다.
셋째, 대통령 선거에서 최종적으로 당선된 사람들은 결국 모두 정치인들이었다. 유권자들이 갈망한 것은 ‘새로운 정치’였지, ‘새로운 세상’은 아니었다.
민주당 경선이 파행으로 치닫자 당내에서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얄팍하다. 안철수 원장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지도 않았다. 안철수 현상은 기존 정치인들과 정당 구조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안철수라는 인물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옳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메시아 신드롬’에서 비롯된 비정상적 요인도 섞여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은 박근혜 후보에게도 해당한다. 환상은 실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언론인 출신으로 최근 <넥스트 코리아>라는 책을 펴낸 김택환씨는 독일을 우리나라의 새로운 국가모델로 제시했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독일 정치 리더십의 정점인 총리는 지역과 주, 정당, 연방정치에서 정치 역량을 검증받은 인물만이 될 수 있다. 검증 없이 단기 필마로 오를 수 없다. 국가와 정당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만이 총리에 선출될 수 있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연재성한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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