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올해 대선은 여성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선거가 될 모양이다. 원내 정당의 대선후보 4명 중 3명이 여성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심상정 진보정의당 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각각 원내 1당과 3당, 4당을 대표한다. 남성 우위 정치 풍토에선 사뭇 색다른 풍경이다.
세 여성 후보 중 개인적으로 심상정에게 관심이 많다. 심상정은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아온 진보정치의 우량주다. 이정희가 속성으로 큰 진보의 아이콘이었다면, 심상정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진보의 터줏대감이다. 80년대 노동운동의 새 지평을 연 ‘구로 동파’(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연대파업이다)의 주역, 최초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맡은 ‘철의 여인’, 2004년 총선의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 등 간단찮은 이력이 심상정의 내공을 말해준다.
심상정은 최근 출마를 선언한 뒤 라디오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책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 보면 ‘진보와 정치 사이에는 작은 오솔길밖에 없다’는 문장이 있다. 굉장히 인상깊었고 위로를 많이 받았다. 진보가 현실정치에서 성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총선 이후 계속된 진보정치의 우여곡절은 심상정의 말을 실감나게 한다. 우리 정치 현실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건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다.
오랜 풍찬노숙 끝에 진보정치는 최근 몇 년 새 부쩍 발언력을 높여왔다. 경제민주화, 재벌개혁, 복지 등 진보정당이 주장해오던 과제들이 이젠 대세가 됐다. 우리 사회가 곪을 대로 곪은 탓이다. 진보정당의 목소리는 미래를 내다보는 바로미터가 됐다.
심상정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경제민주화는 노동에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 것은 곱씹어볼 만하다. 심상정은 정치권이 큰 틀에서 합의해가고 있는 재벌의 제도적인 규제 방안에서 더 나아가 주주, 채권단은 물론 노동자까지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유럽식 공동결정제도를 제기한다.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동자의 실질적 삶을 개선하는 경제민주화의 관점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심상정이 내놓은 암예방특별법, 원전 건설 중단, 국가양육책임제, 무상의료제, 국공립대 통합을 통한 대학개혁 등 어느 것 하나 그냥 허투루 보기 어렵게 만드는 게 요즘 우리 현실이다.
야권 단일화를 놓고 보면 연대나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문재인·안철수·심상정 3자가 머리를 맞대고 정책적 합의의 최대치와 최소치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심상정의 가세는 건곤일척의 양자대결 구도로 내몰린 야권연대에 정책적 스펙트럼을 넓히고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진보가 헝클어진 상황에서 진보정당과의 연대는 중산층의 이반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은 보수인 김종필과 연대하면서 진보인 권영길을 배제했다. 지금의 시대정신이 97년과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문·안·심 3자 연대는 지금의 시대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심상정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진보정치의 큰 진지를 구축할 정치인이란 기대를 품게 한다. 폼으로 진보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아는, 현실에서부터 진보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으로 보인다. 갈라진 진보 내부도 추스르지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할까 하는 의문도 들긴 한다. 정치 우량주가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예도 숱하다. 오바마가 말한 진보와 정치 사이의 좁은 오솔길에서 심상정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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