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논설위원
“경제 하나만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두 손을 불끈 쥐는 대통령 후보, 여기저기서 환호하는 아줌마 아저씨들도 모두 “경제” “경제”다. 후보가 말하는 경제가 누굴 위한 경제인지 시장통 아줌마 아저씨들은 그땐 미처 몰랐을 거다.
엠비정권 5년을 압축적으로 그린 65분짜리 다큐영화 <엠비의 추억>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정치는 이미지고, 유권자는 정책을 잘 따지지 않는다”는 엠비의 독백에 잘 담겨 있다. 욕쟁이 할머니한테 국밥 얻어먹는 티브이광고 틀어대고, 시장통 뻔질나게 찾아다닌 끝에 엠비는 가장 ‘친서민적인 후보’로 포장됐다.
5년 뒤. 후보들이 비교적 양질이니 이번엔 좀 다를 것인가. 박근혜마저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들고나올 정도로 파격적 공약이 쏟아지지만 제대로 지켜질 거라고 낙관하기는 이르다. 왜? 문재인·안철수는 ‘의지’는 있어도 의석이 모자라고, 박근혜는 의석은 되지만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당 정체성이나 지지층 이해관계와도 맞지 않는 이른바 ‘물타기용’ 공약을 마구 던지는 인상이 짙다. 후보 사퇴 때의 보조금 환수 방안을 받으면 투표시간 연장에 동의하겠다고 했다가 하루아침에 말을 바꾼 일은 대선판 약속이 얼마나 졸속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설사 공들인 공약이라 해도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제로섬 게임을 기반으로 해온 여의도 정치구도가 굳건히 버티는 한, 누가 대통령이 돼도 원형대로 관철하기는 어렵다. 안철수·문재인이 심각하게 공방중인 정치개혁 방안도 그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럼 어떻게? “점진적인 변화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안철수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일감 몰아주기 근절 등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최소한 2가지 법안을 대선 전에 국회에서 처리하겠다는 박근혜·김종인의 약속을 활용해보는 건 어떤가. 미흡하더라도 문·안 후보가 김종인안을 수용하는 대신 이참에 몇 가지를 같이 처리하자고 요구하는 거다. 그것도 박근혜가 하겠다고 공언한 것들 중에서. 5년 전 엠비처럼 ‘사기 공약’이 아니라면 응하지 않을 이유도, 명분도 없다. 공약의 진정성도 검증하고, 문·안 후보 단일화를 위한 가치연합의 단초를 여는 일석이조의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공약이라도 대선 뒤엔 그대로 관철하기가 쉽지 않고, 힘센 기관·조직을 손보는 개혁입법은 특히 그렇다. 검찰개혁안이 좋은 사례다. 특별감찰관과 상설특검제를 뼈대로 하는 새누리당 안대희안이 미흡하긴 하지만, 행정·수사경찰 분리를 조건으로 수사권 이양까지 한다니 60점짜리는 된다. 검찰개혁 논의 때마다 검찰은 정치권 수사 등 대형 사건을 터뜨려 여론을 호도하며 개혁 칼날을 피해왔다. 그런데 내곡동 사저 특검 결과가 공개될 11월 중하순께면 검찰개혁 여론도 최고조에 달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때가 법안 처리의 호기다. 문·안 후보가 경쟁적으로 과감한 검찰개혁안을 내놓고 있지만 대선 뒤엔 어렵다고 봐야 한다. 열린우리당 과반 의석을 갖고도 못 고친 국가보안법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박근혜가 최근 약속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과 사장 선출 절차 투명화 관련법 등 찾아보면 60점짜리가 꽤 된다.
단일화도, 대선 승리도 모두 유권자를 위한 좋은 정책을 펴기 위한 수단이다. 60점짜리라도 먼저 해놓고, 그걸로 부족하다는 여론이 모이면 그 힘으로 다시 100점짜리 개혁을 밀어붙이는 2단계 개혁론이 현실적이고, 안철수가 말하는 진심정치에도 부합하는 게 아닐까. 10일 안철수의 정책 발표 때부터 시작해보면 어떤가.
김이택 논설위원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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