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저자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에서 존경할 만한 어른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사회적 멘토’들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티브이와 베스트셀러에서‘만’ 만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인기 강사 정도로 불렸을 이들이 이제 시대의 치유자와 조언자가 되어 그 자신들이 구체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피상적으로 위로해주기 바쁘다. 물론 이것이 그들의 의도나 책임은 아닐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멘토’란 용어는 철저히 상업화된 영역에서 쓰였다. <우파의 불만>의 공저자인 박연은 우리 시대 멘토의 유래를 사교육 시장에서 찾는다. 본래 기독교 서적이나 대안 교육 현장에서 쓰이던 ‘멘토링’은 사교육 시장에 들어와 교육 컨설팅과 학습 관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취업 멘토링, 저소득 멘토링 등이 등장하면서 최첨단 자본주의를 이끄는 ‘성찰적 자기계발’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멘토라는 분들의 이력을 살펴보자면, 많은 베스트셀러 저자들이 그러하듯, 그들을 증명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들은 서울대 교수이거나, 하버드 대학을 나왔거나, 많은 투고 끝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거나,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이 자리에 섰거나 창업을 해서 성공했거나 속세를 벗어났다. 그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어려움 끝에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결국 지금의 자리, 학벌, 직업, 부, 명예, 명성 등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말을 단지 ‘그들의 입’을 빌려 듣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눈을 돌려 시대의 지성이라 불렸던 이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시절을 힘들게 견뎠던 그들은 (후세대로서 이런 표현을 써서 정말 죄송하지만) 망가졌다. 지식인에게 과도한 시대적 책무를 요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동경을 품고 만날 수밖에 없었던 ‘괜찮은 어른’들은 적어도 일상에서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나 존경할 만하지 않았다. 공동체에는 패배감과 우울한 분위기가 존재했으며, 그마저 세대적으로 단절되고 있었다.
한편 작은 단위의 조직에서는 조용히, 그러나 묵묵히 다른 사람들을 챙겨주는 좋은 선배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표’나 ‘1인의 스타’에게 모든 공이 돌려지는 사회에서 그들을 위한 스포트라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히 타자화한 멘토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지금 나를 구성하는 주변을 외면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내가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에 나를 더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 마음이 멘토를 소환한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에 대한 윤여준 전 장관의 지지연설이 큰 화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는 방증이다. 안철수에 대한 열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바람’에 그쳤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영화 <레미제라블>을 통해 ‘정신 승리’를 한다. 혁명의 장면은 자위의 도구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멘토의 자리를 대체할 것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청춘을 탓할 일이 아니다.
가장 단단한 것은 일상이다. 꾸준히 살아내는 삶처럼 위대한 것은 없다. 진짜 멘토는 우리 일상의 자리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그리고 이 사회에 정말 존경할 어른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이것은 이 글을 쓰는 내가 나이가 들어 다시 마주하게 될 질문이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꿈꾸자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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