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의 거리를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1982년 10월 40일간의 옥중 단식 끝에 숨진 박관현 열사의 최후진술의 한 대목이다. 광주항쟁 진상 규명과 양심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중이던 박관현은 1심 최후진술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절절히 토로했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싸웠던 거리에 있지 못하고 광주에서 빠져나가 저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박관현 평전>, 사계절, 2012)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1980년 5월18일 항쟁이 발발하자 주변 권유로 광주를 빠져나간 뒤 1982년 4월 체포됐다. 체포 당시 서울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박관현은 광주에서 숨진 이들을 떠올리며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세 차례에 걸쳐 40일간 이어진 처절한 옥중 단식은 그들에 대한 연대와 부채의식의 발로였다. 박관현이 윤상원 열사와 함께 광주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것은 들불야학 노동운동을 하고 80년 봄 광주의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의 여리고 순수한 인간적 면모 때문일 것이다.
최근 광주지법은 항소심 재판 중 숨져 1심 유죄 판결이 공소기각으로 효력을 잃었다며 박관현 열사 유족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관련자 대부분이 재심으로 무죄가 됐지만 재판 도중 숨진 박관현은 현행법에 막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승남 민주통합당 의원은 최근 하급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심 또는 상고심에서 피고인이 사망한 경우 유족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김동철 의원은 박관현 열사의 특별재심이 가능하도록 하는 ‘5·18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어느 쪽이든 ‘박관현법’이 현실화돼 그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길 기대해본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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