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난 <씨네21>이 주최하는 영화평론상으로 등단했다. 그게 2008년 5월이었으니, 이제 평론가가 된 지도 5년이 된다. 데뷔 때 쓴 글은 ‘홍상수 영화가 사실주의에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경향’에 관한 글이었다. 석사과정 시절의 논문을 바탕으로 했기에 당선될 거란 기대는 별로 없었다. 당시 주성철 기자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전화를 끊고도 믿기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꾸준히 잡지사의 청탁을 받았고, 다른 평들도 꼼꼼히 챙겨 읽었다. 그러다 이제는 직함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고령화 가족>을 보고 나오는 길, 어느덧 영화를 판정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혼자서 영화가 자연주의인지 사실주의인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난 자연주의 계열에 속한다고 정했는데, 이유는 극이 ‘어머니의 마음’을 았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흔히 객관적 의식, 그러니까 규칙적 법칙을 만들어 플롯을 구성하려는 흔적을 발견하면 ‘사실주의 영화’라 칭한다. 하지만 반대로 일말의 낭만적 관습이 극의 흐름을 좌우하면, 그때는 ‘자연주의 영화’라고 부른다. <고령화 가족>은 ‘돼지고기를 굽는 행위’를 반복하거나 ‘함께 같이 국을 떠먹는 행동’에 의미를 두는 영화이다. 곧, 극의 주제가 ‘어머니가 자식들 끼니를 챙기는 모습’으로 응축되니, 이건 한국적 의미에서 자연주의인 셈이다.
집으로 돌아와 다른 평자들의 언급을 찾아 읽었다. 그중 원작과의 차이를 지적하며, 캐릭터의 상황이나 결말이 달라져서 영화가 엉클어졌단 분석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밖으로 나가서 서점에 들렀다. 각색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다. 전통적으로 각색의 성패는 ‘서술된 것’을 어떻게 잘 ‘묘사된 것’과 ‘대사’로 바꾸는가에 좌우된다. 예컨대 프루스트의 소설을 영화화하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샹탈 아케르만(애커만)의 <갇힌 여인>은 분명 좋은 영화지만, 이는 원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의 비교에서 나온 평가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이제 보니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은 서술보다 오히려 묘사나 대사가 더 중요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원작이 너무 영화적이다 보니, 이를 소설과 비교해 말하는 게 과연 정당하냐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나 소설 모두 <고령화 가족>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가족의 숨겨진 진실, 직업으로서의 조폭’ 같은 장치들을 십분 활용한다. 게다가 소설의 표지에는 ‘막장가족이 험한 세상을 헤쳐 가는 생존법’이란 문구까지 적혀 있다. 이른바 막장극의 요소가 이 속에 모두 모였다. 그런데 이건 마치 그리스 비극의 원리처럼, 현재 한국의 극작 속에서 자연스레 통용되는 요소들이다. 분명 막장극의 요소들은 우리 사회의 이야기 패턴을 점령하고 있다. 그러니 영화 <고령화 가족>의 해석은 ‘낭만적 어머니’를 넘어, ‘고전적 원류’를 따르는 플롯을 통해 봐야겠단 결론에 이른다. 그때부터다. 한국적 극작의 원칙을 따른, 이 영화가 어쩌면 사실주의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영화감독 중에서 영화과 출신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가 됐다. 그건 평론계도 마찬가지여서, 유명 블로거나 타 분야 학자들이 더 재미있고 유연한 평들을 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 그건 아마 영화의 시초에 놓인, 시네마토그래피의 요소들을 분석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좌표를 매기고 영화적 장치들을 찾아 알리는 일, 스스로 자세를 다잡는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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