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작가
세련된 것을 좋아한다. 옷이든 영화든 노래든 뭐든 세련된 것이 좋다. 글도 마찬가지다. 형식미가 엿보이는 모더니스트의 언어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한국 시인을 물으면 첫손에 이상을 꼽았다. 식민지 경성의 권태와 절망을 한자, 불어, 영어, 그리고 각종 기호와 숫자가 난무하는 무국적의 시어로 담아낸 그는 식민지 조선의 가장 도회적인 남자 중 하나였다.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오랜만에 그의 시집을 읽으며,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난해한 언어들이 문득 안쓰럽게 느껴졌다. 젊고 예민한 모던보이에게 세련과는 거리가 먼, 비참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얼마나 절망스럽게 느껴졌을지 알 듯도 했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해도 안돼. 넘겨짚자면, 이게 그가 느꼈던 절망이 아니었을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내가 주기적으로 그런 절망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딱히 문화예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지금 한국의 현실이 세련됨과 거리가 멀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련된 것을 사랑하고 또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을 감히 목표로 삼은 자들이라면 주기적으로 압도적인 절망과 한 줌의 희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된다.
보통 셋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다. 이상과 같이 자기파괴적인 길로 들어서거나, 아니면 혐오에 찌든 괴팍한 늙은이가 되어버리거나, 혹은 자포자기하여 현실을 그저 긍정해버리는 것이다. 대중의 이름으로. 혹은 삶의 이름으로. 키치의 이름으로, 자본 또는 인민의 이름으로. 무엇을 택하든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 치이다 보면 원래의 목적은 오래전에 잊혀지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련에 대한 추구는 한이 되고, 병이 되고, 독이 되어 버린다. 황병승의 시 ‘트랙과 들판의 별’에 나오는 어떤 구절처럼. 삼촌의 모습은 너무나도 세련된 것이어서 오늘은 조금도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왜 세련에 대한 사람들의 추구가 일그러져 버리고 마는지, 물론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질곡의 20세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결국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에 닿게 된다. 그러니까 끝내 난해하고 자폐적인 각혈의 흔적을 남기고 간 것은 이상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단지 레몬 향을, 상쾌한 여름밤 같은 이국의 향기를 원했을 뿐이다. 유토피아를 향한 순진한 열망, 그것을 바싹 말라버린 핏자국 같은 그의 언어들 속에서 본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슬프다. 좌절된 열망이 병들어 흉하게 시드는 모습을 보는 것을 그만하고 싶다. 하지만 갈수록 보이는 것은 그런 것들뿐이고, 나빠져만 가는 현실 앞에서 인간 정신은 어느 때보다 무력하게 느껴진다.
지난 주말, 서울시 신청사 건물을 보았다. 숨쉬듯 느리게 변화하는 인공적인 빛깔을 가진 건물은 거대한 외계 생명체 같아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저것은 세련되었는가? 멋이 있나? 아름다운가? 모르겠다,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황병승의 시를 떠올렸다. 이 세상에 세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렇다, 알 수가 없다. 다만, 압도적이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라서 그 앞에 선 스스로가 몹시 무력하게 느껴졌다. 마치 현실 그 자체처럼.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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