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의 정치인이란 이유로 흔히들 아시아의 대처, 아시아의 ‘철의 여인’이란 비유를 한다. 대처 전 영국 총리가 군대까지 동원해 노조를 무력화시키면서 얻은 별명이 철의 여인이다. 남북 당국회담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철의 여인보다는 ‘디테일의 여인’ ‘디테일의 리더십’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남북 회담에서 수석대표의 격은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이 말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디테일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남북 대화의 명운을 가를지도 모를 수석대표 문제를 책임지고 단안을 내릴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 결국 박 대통령이 수석대표 문제가 이번 회담의 중요한 디테일이라고 굳게 믿은 셈이다.
사실 답답한 쪽은 김정은 제1비서다. 권좌에 오른 지 1년이 훨씬 넘었지만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만날 날짜도 잡지 못했다.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전반의 시각도 싸늘하기 짝이 없다. 이젠 북한이 대화에 나온다고만 하면 상전 모시듯 떠받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박 대통령의 정면돌파에는 이런 국내외 상황에 대한 인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디테일에 집착한 사례는 많다. 지난 4월 초 박 대통령이 돌연 북한에 대화 제의를 했다고 청와대가 밝혔는데, 한바탕 소동 끝에 대북정책의 기조 변화가 아니라 음식자재조차 반입되지 않는 개성공단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박 대통령이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부분 남성인 청와대 참모들이 박 대통령 어법의 여성적 코드, 디테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회의 뒤 따로 모여 복기를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도 이때쯤이다. 전체 국면을 꼭 염두에 두지 않고 중요한 디테일에 착안하는 박 대통령 스타일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여성적 섬세함과 단순함, 직관이 오히려 상황을 쉽게 타개할 수도 있다.
이번 회담 무산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은 양쪽이 명단을 교환할 때 우리 쪽이 끝내 수석대표로 통일부 차관을 적어낸 대목이다. 수석대표 문제를 두고 북한을 비판하고 압박할 순 있지만, 중요한 국면에선 우리가 포용하고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나가는 균형잡힌 판단을 했어야 했다. 북한 태도가 설사 억지라 해도 우리가 장관급 회담을 제안해놓고서 북에 최종 통보하는 대표 명단에 통일부 차관을 적어넣은 것은 속좁기 짝이 없는 일이다. 디테일에 끝까지 집착한 건 패착이다. 회담 무산을 북한 탓으로 돌리면서 박 대통령이 상식과 원칙의 대북정책을 폈다고 하는 것은 용비어천가에 가깝다.
중요한 디테일에 착안해 북한의 버릇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든 한반도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북한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마치 천덕꾸러기 동생 같은 존재다. 남한이 형님, 누님처럼 북한의 버릇을 고칠 건 고치되, 결국 타이르고 대화하며 집안 전체의 안녕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다. 박 대통령이 북한을 상대로 통큰 리더십, 맏형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디테일의 정치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디테일만 보다가는 정말 중요한 대국을 놓칠 수 있다. 수석대표의 격이 디테일이라면 남북대화의 모멘텀을 새로 만드는 일은 대국에 해당한다. 디테일 한둘을 놓치는 건 그렇다 쳐도 전체 국면을 보지 못하면 리더로서 자격 미달이다. 변화하는 상황에서 디테일과 전체를 함께 아우르며 그때그때 균형잡힌 판단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디테일의 리더십을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백기철 논설위원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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