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누적 관객수 500만을 넘겼다. 각종 매체에서 흥행에 대한 분석을 내놓는데, 이런 논의들의 귀착점은 결국 ‘김수현의 복근이나 이현우의 미소’에 머문다. 하지만 비단 꽃미남 요원들의 등장이 갑작스런 일은 아니다. 강동원, 윤계상, 김수현으로 이어지는 미남 공작원의 출현은 <의형제>의 휴머니즘 코드, <풍산개>의 판타지적 요소 등과 결합해 제각각 다른 색깔을 빚어낸 바 있다. 그런데 관객들이 환호하는 배우의 스타성에 동조하더라도, ‘동네 바보가 알고 보니 남파간첩’이라는 코미디 장르의 관습을 이해하고 보더라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취하는 허술한 전략 앞에선 자꾸 멈칫하게 된다. 간첩의 몸에 알고 보니 지피에스 칩이 심겨 있는 설정 같은 건, 1998년작 <쉬리>의 키싱구라미가 이룩한 첩보활동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듯 보인다. 구시대적 첩보작전의 여파 때문인지, 상영시간 내내 영화의 고릿적 설정들을 과연 장르로만 덮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권력의 메커니즘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적어도 시대에 따라 비밀 폭로의 기제만큼은 급격히 변화하는 추세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는 자신의 경험상 비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범법이 행해지기 때문에 내부비리 폭로 전문 사이트를 구상하게 됐다고 전한다. 실제로 1971년에 군사분석가 대니얼 엘즈버그는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려 <뉴욕 타임스>를 활용했으며, 당시 그가 신문사에 보낸 문서는 ‘서류를 복사한 종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서류의 형태는 전부 ‘파일’로 변한다. 이른바 유에스비(USB)가 세상을 여는 열쇠로 등장한 것이다.
인터넷이 낳은 폭로의 예는 무수히 많다. 2010년 바그다드에서 군사정보 분석병으로 일한 브래들리 매닝의 폭로가 그런 경우고, 얼마 전 미국 개인정보 수집에 대해 고발한 에드워드 스노든 역시 마찬가지 예이다. 매닝은 위키리크스를 통해 2만건의 비밀 외교문서와 군사문서를 대중에게 내놓았는데, 스노든은 ‘프리즘’이라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치밀하게 개인정보를 빼내는지를 위키리크스에 까발렸다. 스노든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국은 프리즘을 이용해 통신서버에 접속한 사람들의 통화나 정보 등을 구체적으로 뽑아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인터넷 검색창에 무얼 입력했는지조차 데이터화시킨다고 한다. 한번쯤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일이지만, 막상 실용화됐다고 들으니 섬뜩하다. 통신장비만 켜도 위치가 노출되는, 인터넷이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한데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보이는 영화 속 첩보작전은, 뉴스를 통해 들리는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금도 스노든은 정보가 새는 것이 두려워 옴짝달싹 못하고 치밀하게 움직이겠지만, 영화 속의 공작원들은 그저 지붕을 훌쩍 뛰어다닐 뿐 별다른 특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007> 시리즈의 엠아이6(MI6) 요원들이 영국의 지하기지에서 최신 기재를 시험하는 동안, <미션 임파서블>의 임무가 매번 빠르게 진화하는 동안, 왜 한국 영화 속 비밀요원들만 조선시대의 홍길동 체력으로 버티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프로타고니스트를 강하게 만드는 건 자고로 개성 있는 안타고니스트의 등장이라고 했다. 영화 속 콘텐츠가 현실보다 앞서더라도 관객들은 너그러이 묵인해준다. 이제는 재기발랄한 첩보영화들과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 꽃미남의 비주얼 같은 건, 흥행의 부차적 요인이 되더라도 충분히 아름답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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