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작가
블랙미러는 2011년 시작된 영국의 텔레비전 시리즈다. 제목인 블랙미러는 텔레비전,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의 화면, 불이 꺼지면 거울처럼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검고 매끄러운 표면을 은유한 표현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에스엔에스(SNS)로 상징되는 이천십년대의 시대상을 극단적으로 그려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 도입부, 영국 왕실의 공주가 납치된다. 납치된 공주가 담긴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온다. 공주의 입을 통해 전해진 납치범의 메시지는 공주를 살리고 싶으면 총리가 돼지와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겨운 설정을 통해 이야기가 다루려는 것이 테러나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은 곧 명백해진다. 동영상 원본은 즉각 삭제되었지만 빠르게 퍼져나가는 복제본을 막을 길은 없다. 유튜브와 트위터에는 곤경에 처한 총리를 놀리는 답글이 올라오고, 그것을 본 총리의 부인은 충격을 받는다. 한 방송국 여자는 정보를 얻기 위해 정부기관의 직원에게 자신의 누드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그렇게 얻어낸 정보로 납치범 검거 현장에 갔다가 범인으로 오인당해 총에 맞는다. 한편 납치범 검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공주의 반지가 끼워진 잘린 손가락이 방송국에 배달된다. 동영상 조회수가, 관련 트위터 횟수가, 그를 통해 짐작되는 여론이 실시간으로 수렴되어 전파를 탄다. 여론은 총리에게 등을 돌리고, 사람들은 티브이에서, 핸드폰에서,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결국 총리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돼지와 성관계를 맺고 그것이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는 순간 오프라인 세상은 정지한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노골적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춘다. 사람들은 그 끔찍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커다랗게 뜨인 눈들, 그것은 내가 최근에 접한 가장 역겨운 이미지였다.
고약하게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년 후, 뉴스에 공주와 총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아주 괜찮아 보인다. 공주는 임신을 했고,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더 높아졌다. 하지만 총리 공관의 문이 닫히고, 카메라가 멈추고, 그의 아내의 얼굴에서 대외용 미소가 사라지고 난 뒤, 우리는 총리의 사적 삶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침내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정지한 검은 화면 속에 비치는 얼빠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라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이미 블랙미러 속 세계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는 것이다. 한바탕 이목을 끌 사건과 사고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그리하여 모두가 모두의 축제가 되어버린 세계, 모두가 모두의 블랙미러가 되는 세계에서 부끄러움 따위는 필요 없다. 수치심을 모르는, 호기심에 굴복한, 커다랗게 뜨인 눈들. 중단되지 않는 시선들로 이루어진 세계. 블랙미러 속 이야기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위안은 결국 그게 한 미친 예술가가 고안해낸 퍼포먼스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끔찍하도록 닮아 있는 우리 현실의 이야기들은 누군가 고안해낸 퍼포먼스도 티브이 쇼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멈출 곳을 지나쳐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끝낼 줄을 모른다. 검은 거울에 비친, 우리의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이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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