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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미 동맹이라는 덫

등록 2013-07-09 19:41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929년의 유럽. 세계 공황, 독일 경제의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 이탈리아 파시즘의 공고화, 이탈리아를 모방하려는 극우 정권들의 포르투갈 등지에서의 출범…. 10년 뒤인 1939년에 어떤 일이 터질지 아무도 아직 감을 잡지 못했지만, 불안과 공포가 1929년의 유럽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불안한 세계에 메가톤급 센세이션이 터졌다. 평화주의자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1889~1938)가 독일 공군이 국제조약들을 위반하여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 곧 독일군이 공군을 이용하는 침략 전쟁의 야망을 버리지 않고 평화에 대한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전격 발표했다. 그전에도 이와 같은 의혹들이 제기됐지만, 이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나치 독일 지도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주된 근거는 침략 전쟁 준비와 실행이었는데, 오늘날 미국 지도자들도 그 전철을 동요 없이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스노든의 폭로로 그들이 전세계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혹은 이제 사실로 드러났다.

오시에츠키의 고발에 대한 ‘민주적’ 바이마르 공화국 당국의 대응은 강경했다. 실제 감옥에서 7개월 정도만 복역해 사면으로 석방됐지만, 오시에츠키가 재판에서 ‘반역, 간첩 혐의’로 일단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당국의 조약 위반 사실을 고발한 양심가는 당국자에게 ‘반역자’이었던 만큼 수많은 세계인들에게는 영웅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런드 러셀 등을 비롯한 수십만명의 각국 시민들이 오시에츠키 옹호 캠페인에 동참했고, 급기야 그는 193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그러나 그때 독일은 이미 나치들의 차지가 되고, 오시에츠키는 수용소의 수인이 되고 말았다. 나치들의 천하에서 오시에츠키는 상을 받으러 출국조차 하지 못한 채 무리한 강제 노동과 질병으로 요절했고, 그에게 상을 준 노벨 위원들은 1940년 히틀러의 노르웨이 침략 이후에 특별히 처벌을 받은 만큼 그의 ‘반역’에 대한 복수는 완벽(?)했다.

2013년의 세계. 세계 공황, 구미권의 얼어붙은 경제, 특히 남유럽 등지에서 더 이상 민심에 아랑곳하지 않으려는 정권들의 점차적 권위주의화…. 아직도 표피적으로 태평성세, ‘글로벌 시대’의 지속이지만, 미국의 주도로 세계 군비는 이미 냉전 말기의 수준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적 무력 갈등은 아직 머나먼 것으로 보이지만, 시리아 같은 곳에서 이미 러시아와 이란이 무장시킨 세속적인 정권과 미국과 그 지역적 군사보호령들(사우디 등)이 무장시킨, 주로 종교 근본주의적 성격의 반군이 최악의 내전이자 국제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다시피 하는 이 세계에 메가톤급 센세이션이 터졌다.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미국 컴퓨터 기술자가 중앙정보국(CIA)의 요원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더는 양심상 용인할 수 없어, 미국 정부의 정보기관들이 정보 보호에 관한 국제법을 모조리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격 폭로했다. 그가 폭로한 행위, 예컨대 수억명 세계 시민들의 전자 검색 내용이나 전자우편, 통화 감시부터 시작해서 중국 국내 네트워크 해킹, 수억개 전자 메시지 훔쳐보기까지의 행위는 사실상 일종의 ‘인터넷상의 전쟁 행위’로서, 미국의 라이벌이 되는 나라(특히 중국)에 대한 실전 준비 차원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크다. 나치 독일 지도자들이 전후에 유죄 판결을 받은 주된 근거는 침략 전쟁 준비와 실행이었는데, 오늘날 미국 지도자들도 그 전철을 동요 없이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들이 전세계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혹은 이제 사실로 드러났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를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과연 계속해서 잠재적 침략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가? 영세중립 등의 가능성들을 꼭 배제해야 하는가? 더 늦기 전에, 한반도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꼭 심각하게 생각해볼 대목이다.

스노든의 고발에 대한 ‘민주적’ 미국 당국의 대응은 초강경이었다. 미국 당국자들이 스노든을 ‘반역자’라며 고발 조처를 취하고 그가 더는 ‘도망’다니지 못하게 그의 여권을 폐기했다. 미국 대통령이나 외무 관계자들은 스노든을 도와주려는 불법 감시 피해 국가들을 상대로 “범인을 넘겨주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여느 학교 ‘왕따’ 가해 학생 못지않게 ‘무자비한 복수’를 기약한다. 스노든이 붙잡힌다면? 지금 재판중인 또 한 명의 양심적 고발자인 브래들리 매닝은 어쩌면 20년형을 받을 기능성이 있는데, 당국의 ‘복수’ 욕망의 정도로 봐서는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너무나 불길한 예감이지만, 나치들의 감시 속에서, 끝내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해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죽은 오시에츠키가 떠오른다. 한데, 스노든에 대한 옹호 캠페인은 이미 거의 오시에츠키 방어를 위한 국제 운동과 비슷한 규모가 됐다.

기시감이 들 정도라고나 할까? ‘오시에츠키 사건’과 ‘스노든 사건’이 우연히 닮았다기보다는, 어떤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게 문제다. 세계 공황 속 경제난과 열강 대립 격화의 가능성들,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거나 지난 10여년 동안 (이라크 등지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어 국제적 영향력이 감퇴한 군사주의적 국가의 전쟁 준비 행위에 대한 양심적 고발, 고발자를 ‘반역자’로 모는 당국자들의 태도, 요동치는 세계여론…. 한 가지 아이러니한 차이라면, 거의 80년 전에 노벨위원회가 노벨평화상을 오시에츠키에게 준 반면, 지금 그 평화상을 이미 받아놓은 것은 바로 스노든을 마녀사냥하는 주범 오바마다. 슬픈 아이러니지만, 그만큼 ‘평화’에 대한 노벨위원회의 이해가 달라진 셈이다. 물론 80년 전의 노르웨이는 독일의 동맹국이 아닌 것과 달리 오늘날의 노르웨이는 나토 가입국, 곧 미국과 군사적으로 한패가 된 나라다.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맹국이다. 곧, 스노든이 고발한 ‘글로벌 빅브러더질’로 얻은 정보의 일부분, 예컨대 대북 관련 정보 등을 한국의 ‘기관’들도 어쩌면 얻을 수도 있단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고발은 우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이 고발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우리에게 한-미 동맹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국내 보수주의자들은 한-미 동맹을 ‘평화의 보장’이라고 홍보한다. 실은 어쩌면 과거에는 그런 측면도 있었다고 솔직히 인정해주어야 한다. 미국 당국자들이 한국 당국자보다 더 평화 지향적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 냉전적 질서 속에서 조폭 보스와 일개 졸개의 전략적 사고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68년 1·21사태(북한의 청와대 습격 시도) 이후 박정희는 한때 대북 침공까지 고려했지만, 미국은 이와 같은 망상적 이야기를 애초부터 일축했다. 북한과 소련이 엄연히 동맹국이었던 상황에서 ‘대북 침공’은 3차 세계대전을 뜻하고, 아직 성장 드라이브 중인 미국이 굳이 이와 같은 무리수 없이도 중국이나 소련과 같은 라이벌들을 점차 포섭하거나 무력화시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국제 냉전이 끝나고 미국으로서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고 나서 역할은 돌연히 전도됐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에 이제 한국이 아닌 미국은 영변 시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검토했고, 그 반대로 김영삼 대통령이 ‘대북 전쟁 가능성’을 들먹였던 클린턴을 견제해야 할 정도였다. 결국 김영삼의 설득보다도 북한을 침공할 경우에는 수십만명의 미군이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계산이 클린턴의 전쟁 열의를 억제한 셈인데, 지금 같은 경우에는 단순히 북-미 관계보다 문제가 훨씬 더 크다. 미국의 불법 정보 수집 행위의 가장 큰 피해국 중의 하나는 바로 중국이며, 미국의 제1호 가상 적도 바로 중국이다. 미국의 성장 드라이브가 고장난 지 이미 오래됐으며, 이와 달리 ‘시장’의 일부 폐단을 면할 수 있는 중국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 경제는 아직도 고속성장 중이며, 아마도 2016년을 전후로 해서 미국을 추월할 상황이다. 평화가 지속되면 몇 년 뒤에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 될 중국은 당연히 그 어떤 전쟁도 바랄 일은 없지만, 미국으로서는 중국보다 월등히 강한 부문이라고는 군사 부문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화에 대한 위협은 어느 쪽에서 나오는지 불문가지의 일이 아닌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를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계속해서 잠재적 침략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가? 영세중립 등의 가능성들을 꼭 배제해야 하는가? 더 늦기 전에, 한반도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꼭 심각하게 생각해볼 대목이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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