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요즘 첩보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정보기관으로부터 버림받고 쫓기는 경우가 많다. 조직의 필요상 제거 대상이 되기도 하고(<본> 시리즈), 상사가 배신을 하기도 한다(<베를린>). 오래된 영화 중에도 조직을 상대로 싸우게 되는 개인의 이야기를 그린 경우가 있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1975년 작품 <콘돌>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말단 조사원(로버트 레드퍼드)이 중동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비 문서를 접하게 되면서 시아이에이의 살해 위협을 받게 되는 이야기다.
만약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근래에 벌인 공작들을 소재로 삼아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 일단 스펙터클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인도네시아 협상단의 호텔방을 뒤지다 들킨다든가 오피스텔에서 댓글이나 달고 있는 모습을 담으려면 정통 첩보물보다는 블랙코미디가 어울린다. 선거 때마다 특정 정당의 편을 드는 정보기관이 유례가 없기 때문에 약간 억지스러운 영화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시놉시스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써보자.
제목: <엔엘엘로 진로를 돌려라>
#기: 2012년 12월 초.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은밀한 공간에 모여 있다. 책상에는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라는 문건이 놓여 있다. 대선과 북한, 엔엘엘이라는 단어가 들린다. 이어서 국정원 여직원의 캐릭터 설정 숏. 명문대를 나온 재원이지만 고작 하는 일이 인터넷에 댓글 쓰는 일이라 썩 유쾌해 보이진 않는다. 내곡동에 출근해 게시판에서 ‘원장님 지시말씀’을 보고 이걸 어떻게 여러 아이디로 변주하나 고민하며 은신처로 돌아오던 중, 낯선 사내들이 탄 자동차에 의해 추돌사고를 당한다.
#승: 여당의 대선 후보가 티브이 토론에 나와 여직원이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몇시간 뒤 경찰은 심야 기자회견을 열어 여직원의 컴퓨터에서 선거에 개입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는 거짓 발표를 하고, 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한 신문 기자의 특종기사로 진실이 일부 드러나며 국정원의 대선개입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져간다. 법무부 장관은 국정원장을 구속하려는 검찰을 주저앉히지만 선거법 위반 기소까지 막지는 못한다. 정부 여당은 대선 때 우려먹었던 엔엘엘 카드를 다시 꺼낸다. 전형적인 맥거핀이다.(맥거핀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창안한 극적 장치로, 어떤 사건이나 물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관객의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속임수다. 예를 들어 <싸이코>의 돈가방이나 <도둑들>의 다이아몬드.) 블랙코미디라면 아둔한 조연은 필수다. 엔엘엘을 덥석 무는 야당이 제격이다.
#전: 앵무새 방송과 신문들 덕에 국면 전환에 성공한 뒤, 이제 엔엘엘은 잊고 민생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하던 차에, 여당의 실력자라는 사람들이 ‘실은 엔엘엘이 국정원과 함께 준비한 또 하나의 대선 공작이었음’을 육성과 녹음파일로 폭로한다. 첫 장면의 검은 얼굴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대통령의 사전 인지 여부로 의혹이 옮겨붙을 수 있는 긴박한 상황. 청와대는 또다시 국면 전환을 시도한다. 감사원의 4대강 사업 감사 결과에 숟가락을 얹어가며 전임 정부를 직접 비난하고, 국정원과 국방부가 나서 다시 엔엘엘에 불을 지핀다. 그런데도 미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고맙게도 야당 대변인이 말실수를 해준다. 책을 인용한 말이었지만 언론이 떠들어준 덕에 다시 한번 국면 전환에 성공한다.
#결: 아직 결론을 내기엔 이르다. 참고로 <콘돌>의 결말은, 주인공이 제보한 시아이에이의 만행이 <뉴욕 타임스>에 실리는 장면이다. 슬프게도 7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결말은 우리 영화의 도입부에 불과하다.
이재성 사회부 사건데스크 s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