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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피와 향수 / 김사과

등록 2013-08-04 19:13

김사과 작가
김사과 작가
늦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올해 초 영화 <신세계>를 봤다. 최근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과거 박찬욱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폭력적이며 탐미적인 세계관을 계승한 가운데, 하지만 박찬욱의 영화에 잔존하는 삼팔육적 윤리, 다시 말해 일말의 계몽주의와 정치성을 매끈하게 발라낸 뒤 폭력적인 세계관 자체를 순수하게 쾌락으로 승화시켜 진정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를 탄생시킨 것으로 보였다. 그 영화의 가장 감탄스러운 면은, 자신이 다루는 세계와 인물에 대해 어떤 윤리적인 판단도 가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등으로 상징되는 이천년대 초중반 한국 영화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밀란 쿤데라적 면모, 존재의 가벼움을 참지 못하는 태도가 <신세계>에는 없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문제인가? 영화란 즐거우면 되는 게 아닌가? 대중문화 아닌가? 즐거움이 즐거움에 한하는 한, 무엇이 문제인가? 무중력의 아찔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구식 태도다. 그리고 실제로 그 구식 태도는 이천십년대 한국에서 설 자리를 잃은 듯이 보인다. 막장 드라마, 조폭 영화, 아이돌 음악으로 거칠게 분류할 수 있는, 이천십년대 한국의 세련된 대중문화의 핵심에는 일말의 윤리적 판단을 시원하게 날려버린, 오직 재미의, 재미에 의한, 재미를 위한, 쾌락주의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한계 없는 쾌락주의적 세계관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과거 한국을 지배했던 무조건적인 성공 지향적 세계관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성공하면 돼. 좋은 대학에 가면 돼. 부자가 되면 돼. 그리고 성장이 한계에 달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캐치프레이즈의 키워드는 성공에서 재미로 바뀌었다. 어쨌든, 재밌으면 돼. 재미로 한 거야. 즐거웠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우리는 과거 우리를 옭아맸던 목표들-돈과 힘, 성공을 향한 욕망-을 재료 삼아 유희하기 시작한 것이다. 캐치프레이즈는 기능을 멈추었으므로. 그것은 더 이상의 어떤 믿음도 위안도 다시 말해 환상을 생산해내지 못하므로.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이룩했으니까, 이미, 우리가 이뤄낸 꿈이 악몽의 형태로 현실에 펼쳐져 있으므로. 남은 것은 그것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다. 환상 없이, 즐겁게, 즐겁게.

피로 가득한 웅덩이에 향수를 뿌린다.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성공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달성된 지금, 그런데도 더 많은 고통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쾌락. 인터넷-신도시-브랜드 아파트로 이루어진 우리의 즐거움. 테크놀로지와 헐벗은 마음으로 된, 돈과 피 그리고 힘을 향한 욕망-엔터테인먼트로서의 악의. 그것이 이천십년대의 한국이 이룩한,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정점에 닿아 있다. 그러나 달도 차면 이지러진다. 남은 것은 지리멸렬함이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그것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낫다. 그렇지 않다면 남은 것은 자멸뿐이므로.

브라운아이드걸즈의 ‘킬빌’ 뮤직비디오의 결말, 타란티노의 원작과 달리 등장인물은 모두 죽는다. 거기엔 영웅도 희망도, 의미조차 없다.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자멸로서의 죽음. 어쩌면 지금 사람들은 피곤한 것이다, 삶 그 자체가.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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