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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내 청춘의 가족 / 김류미

등록 2013-09-22 18:40

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 저자
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 저자
대학 때 남자 2명, 여자 2명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주거 공동체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느 대학가 변두리의 2000만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었다. 관리비도 없이 몇 년간 집값을 올리지 않는 주인이 고마웠지만, 전셋집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지하 방 한 칸. 나는 몇 권의 책이 꽂힌 작은 책장과 먼지 가득한 옷들 사이에 누워 고시원보다 큰 네모난 천장의 무늬를 세며 꿈을 꾸곤 했다.

취업의 초조함을 견뎌야 할 학기가 되니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력서를 쓰고 나서만큼은 진이 빠져서라도 밥다운 밥을 먹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면접은 잘 봤어?”라는 말도 듣고 싶었다.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대화가 아닌 ‘남들과 같은 일상’이 살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해주는 밥, “그래, 회사는 어떻디?”란 말은 자리를 고쳐 앉게 만드는 부담감이 있다. 알바를 몇 개씩 하며, 대학 내내 한 학기도 빠짐없이 가계 곤란 장학금, 생협 장학금, 심지어 교회 장학금까지 받아 썼지만, 나에게 투자된 비용이 적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매달 30만~40만원을 하숙비로 쓰는 이와 보증금을 가진 내가 살림을 합치면, 이론적으로는 훨씬 좋은 집에 살 수 있게 된다. 노부부가 사는 단독주택의 방치된 반지하에는 방 3개와 거실이 딸려 있었다. 벌레가 가득했지만 볕은 잘 들었다. 재활용센터에서 가전제품을 사 n분의 1로 나누었고 누군가가 가진 드라이기, 세탁기, 청소기 등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서로의 책장이 참고도서의 범위를 넓혀주었고 각자의 전공과 관심사는 간학문적으로 고민을 발전시켜 주었다. 나는 ‘다른 삶’이 가능함을 믿었다.

주말에는 버스를 타고 근처 재래시장에서 장을 봤다. 역시 n분의 1이었다. 함께 전을 부치고, 요리를 했다. 미처 내려가지 못한 명절에는 쓰레빠를 끌고 나와 영화를 보고 달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언제 결혼해야 하는지,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지, 외면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명절 스트레스가 아닌 일상으로 나누어졌다. 끈적거리지는 않지만 느슨한 연대였던 우리는 서로에게 ‘대안 가족’이었다. 혈연이라는 자격으로 사생활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만 평소에는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친척들, 에스엔에스(SNS)에서 드러난 일상으로만 서로를 ‘아는 사이’와는 좀 다른 ‘일상’이 있었다.

캠퍼스 라이프의 상징으로 포장된 <논스톱>이나 영화 <가족의 탄생>, <바람난 가족>들의 문제의식과는 달리, 사실 우리의 일상은 ‘생존의 영역’이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끝이 정해진 시간이었지만, 치열했으나 즐거웠던 일상을 통한 마지막 성장기는 서로의 삶에 튼튼한 경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대학에 침투한 자본 탓’이라곤 해도 지난 10년간 청춘의 환경은 급격히 변해왔다. 대학은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사적 관계의 최후의 보루이자 기본 소양을 만들어준 과반학생회, 학회와 동아리들이 와해되었으므로.

부모님과 함께 전을 부치며 친척을 맞이하는 명절을 보내는 오늘날의 내게는 그 시간과 그 가족들이 ‘피보다 진한 물’처럼 남아 있다.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 일상성. 파편화된 우리의 삶에서 ‘일상을 찾기 위한 몸부림’은 이제 생업의 문제가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만큼은 그 ‘일상’을 충분히 그리워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지나간 청춘의 바람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우리는 계속 살아나가야 하므로.

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 소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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