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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연약한 악 / 김사과

등록 2013-09-29 19:20

김사과 작가
김사과 작가
<브레이킹 배드>는 2008년 시작되어 이번 달로 막을 내리는 미국의 텔레비전 시리즈다. 폐암에 걸린 중년의 고등학교 화학 교사가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려고 화학 지식을 동원해 필로폰을 만들어 판다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시작된 이 시리즈는 자극적인 소재를 통해 미국의 의료보험 문제와 백인 중산층의 위기를 그럴싸하게 엮은데다 배우들의 호연, 탁월한 영상, 그리고 잘 쓰여진 각본 덕에 한번 보면 빨려들어가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매회 시청자들을 트라우마에 빠뜨릴 정도로 잊을 수 없이 폭력적인 장면들이다.

사실 그 장면들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묘사되는 극단적인 상황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묘사되는 방식에 있다. 카메라는 눈앞에 펼쳐진 끔찍한 상황을 시종일관 집요하게 그러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성격 고약한 신처럼. 끔찍하지만 동시에 웃긴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처참한 비극은 다음 순간 멀리서 벌어지는 기괴한 희극으로 돌변한다. 악취미적인 세계관이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시리즈를 좋아하면서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망설였다. 지나치게 염세적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방영된 끝에서 세 번째 편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는데 왜냐하면 이 편에서 시리즈는 비로소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한 인상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적었듯 이 시리즈는 극단적인 캐릭터와 설정으로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것은 한두 번이나 흥미롭지 금방 지루해진다. 그래서 이야기와 인물을 더 극단으로 끌고가는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막장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폭주를 거듭하며 괴물이 되어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흥미롭긴 하지만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가 있다. 가족을 위해서.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표면적인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힘든 상황에 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약왕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지난해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그 드라마에서 냉혹한 기업 회장 역을 맡았던 박근형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해 그는 악한 게 아니라 나약한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처남이 죽을 상황에 처하자 깡패들을 향해 살려달라며 애처롭게 매달린다. 그건 자신에게 장애물이 된다면 동네 양아치에서 마약계 대부까지 가리지 않고 제거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악당의 모습이 아니다. 사실 그가 시작부터 끊임없이 보여준 이런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그가 어떤 악행을 벌여도 시청자들은 그를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여전히 인간적인 면이 남아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는가? 아니, 그 반대다. 그가 가진 나약함이 그가 벌이는 악행의 동력이므로. 그가 무시무시해질수록, 그의 영혼은 더 허약해져간다. 공포가 그를 강하게 만들고, 괴물이 된 그는 어느 때보다 더 위태로운 존재가 된다.

거리낌 없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겪은 아주 작은 상처나 고통에는 엄청나게 민감하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심약한 탓에 자신 이외의 것을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악은 매우 평범하지만, 또 어떤 악은 부서질 듯 약하다. 인간적이다.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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