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작가
내가 어쩌다가 우디 앨런의 팬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매치포인트>가 나올 무렵이었던 것 같다. 대학교 과제로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나서, 끝없이 펼쳐진 목가적 풍경에 몹시 마음이 불안해진 나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곧바로 <매치포인트>를 보기 시작했다. 첫 장면부터 펼쳐지는 수다, 수다, 도시, 도시에 내 마음은 빠르게 안정되어갔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2~3년 전부터 그의 뉴욕 영화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구상 중이어서 뉴욕에 관한 것이라면 1달러짜리 사과 모양 냉장고용 자석까지 소중히 여길 정도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애니 홀>이 좋았다. 열 번도 넘게 보았고, 친구와 영화의 주제에 관한 엄청난 양의 아이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고, 심지어 대본을 프린트해서 읽기도 했다.
사실 그의 세계관은 <애니 홀> 같은 귀여운 영화들보다 삶의 비참과 불가능한 환상을 교차시키는 <카이로의 붉은 장미> 같은 영화에 더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는 세계의 무의미를 믿고 그래서 환상을 옹호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실과 환상을 오락가락하며 미쳐가면서도 절대로 삶을 놓지 않는 인물들, 그들이 보여주는 엄청난 생명력이다. 실제로도 우디 앨런은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며, 죽음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작 <블루 재스민>은 그런 우디 앨런의 세계관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어쩐지 기분이 씁쓸했다. 집에 돌아와 그의 옛날 영화들을 돌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블루 재스민>은 의미값이 0인 영화라고.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나는 도무지 그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삶이란 ‘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게 <블루 재스민>에서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대신 심술궂은 야유와 비정상적인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방향성도 없다. 그저 과도하게 살아있다. 마치 암세포들 같다. 아니, 실수로 죽음이 프로그래밍되지 못한 생명체. 참으로 미국적인, 아니 현대적인 세계관이다.
이제 한국도 노령사회로 접어들고 있어서 그런지 생명력으로 넘치는, 화려하게 빛나는 노인들이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그런 그들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젊어서 그런지, 늙으면 죽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지나친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과도한 반대야말로 삶과 죽음의 본질적 무의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후쿠시마 같은 대참사를 낳는 게 아니냐고 우디 앨런 찬성파 친구와의 카톡 논쟁 중 말했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 친구는 <블루 재스민>이 우월한 영화라고 주장했고 나는 <블루 재스민>은 틀렸다고 맞섰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 일치도 없었다.
그런데 카톡 창을 닫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우디 앨런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생을 바치는 동안, 그녀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그런 행위의 부질없음을 설파하는 우월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들 것이고, 그러면 다시 그들은…. 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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