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도난당한 편지>는 “너무 명민한 지혜만큼 밉상스러운 것도 없다”라는 세네카의 명언으로 시작한다. 1800년대 파리의 탐정사무실에 경시총감이 찾아온다. 그는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편지 한 통’을 찾고 싶단 의뢰를 한다. 편지의 주인은 정체를 밝히기 힘든 어느 부인인데, 편지를 훔쳐간 사람은 그 아래의 장관이다. 경시총감은 이미 장관이 집을 비울 때를 이용해 집의 구석구석을 뒤진 상태다. 하지만 편지를 찾을 수 없었다. 온갖 과학적 방법이 실패했을 때 경시총감은 탐정을 찾아온다. 그렇게 탐정의 추리가 시작되고 얼마 후 편지가 숨겨진 곳이 발각된다. 책상 주변의 편지함이 답이다. 장관은 경찰들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대비했는데, 그 전략이 적중했다. 아마 탐정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편지는 그의 손에 좀 더 머물렀을 것이다.
이 유명한 이야기를 심리학자들은 ‘기호의 체계’에 대한 암시로 읽었다. 각각의 인물들은 각자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 편지의 행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편지는 ‘불안의 요소’로서 극의 전개를 이끌고 간다. 왕권을 위협하는 매개가 되며, 욕망의 집합점이 된다. 정작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중요치 않다. 요즘 텔레비전을 켜고, 들려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이 소설의 내용이 생각난다. 라캉의 말처럼 국민은 이야기 속 ‘순진무구한 왕’이 맞다. 이야기 속의 그는 바깥의 평화로움을 본다고 느끼지만, 끝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반면 장관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지식을 이용해 사회적 게임을 끌어가고, 남들이 가진 불안을 이용해 출세를 한다. 현실도 비슷하다. 빨간색이 잔뜩 묻은 ‘편지’ 덕에 승진을 하게 된 장관은, 현재 편지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여전히 편지는 장관의 손에 쥐여져 있으며, 그는 딱 잘라서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는 중이다. 그리고 의심하는 왕의 시야를 딴 곳으로 돌리려고 고군분투한다. 트위터를 동원한 여론조작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여권은 지금도 사건의 본질을 흩뜨리고 있다. 국민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그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해 국민들께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사전에 준비한 듯 여권은 야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탐정’이다. 밉살스러운 지식을 이용해 스스로의 욕구를 채우려는 자들을 좌지우지하는 캐릭터 말이다. 현실 속의 탐정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를 통해 이런 상상을 할 수는 있다. 스릴러의 거장 히치콕 감독은 1956년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란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이 작품에 ‘몰라도 될 정보를 알게 된 미국인 가족’을 설정했고, 그들이 아는 정보를 ‘믿어주지 않는 인물들’을 주변에 흩뜨려 놨다. 그리고 스스로 탐정이 되어서 사건들을 조정하는 위치에 섰다. 당시 그가 겨냥했던 게 ‘냉전의 종식’이라 말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이 될까. 어쨌건 냉전은 끝이 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조차 체재가 그들을 보호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다만 체재를 통해 세상이, 혹은 이야기가 굴러간다고 보았을 뿐이다. 영화 <설국열차> 속의 멈춰진 설원이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가 했던 역할, 그건 아마 탐정이 맞지 싶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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