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지난 12일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두 개의 행사가 있었다. 한쪽에선 국정교과서 전환 움직임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국정 체제를 찬성하는 이들의 세미나가 있었다. 앞의 행사에는 강만길, 김정기, 노중국, 박현서, 이만열, 조동걸, 이이화, 조광 등 원로 교수들이 참여했고, 뒤의 모임은 오일환 보훈교육연구원장, 김춘규 바른역사국민연합 대표, 권희영(한국학), 이명희(국사), 강규형(기록정보) 교수 등이 주도했다.
같은 날 수원지방법원 앞에선 두 개의 모임이 100m 거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다. 한쪽엔 군복 차림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 200여명이, 다른 쪽엔 젊은이들 60~70여명이 있었다. 법정에선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첫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이 두 장면을 놓고 매체들은 보수와 진보의 정면대결이라고 보도했다. 일부 방송에선 아침부터 전문가 대담을 통해 내란음모 재판이 한국의 진보-보수, 좌-우의 한판 승부가 될 것이라고 떠벌리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장면의 성격은 면면만으로도 확인된다. 앞선 장면에선 평생 한국사를 연구해온 역사학계 원로들이 한편에 있고, 다른 편엔 둘을 제외하고는 역사학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이었다. 진보-보수, 좌-우가 아니라, 전문가 집단과 비전문가 집단의 행사였다. 수원지법 앞엔 세대로는 장·노년과 중·청년들이, 소속으로는 블루유니온 따위의 생경한 단체와 통합진보당, 성향으로는 종북을 혐오하는 이들과 내란음모를 조작이라고 믿는 이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문제는 종북 여부였다. 진보-보수의 대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북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진보이고 종북주의자는 좌파일까? 북 체제를 추종한다면 그건 종북일 뿐 좌-우, 진보-보수와 무관하다. 인민을 억압하고, 굶기고, 멋대로 처형하는 정권을 진보라고 할 수 없다. 가부장 질서라는 유교 이념에 바탕한 북 체제의 추종자를 좌파라고도 할 수 없다. 봉건체제의 신민일 뿐이다.
교과서 문제의 핵심은 교학사 교과서가 안고 있던 사실 오류, 일제의 병탄과 이승만·박정희 독재의 평가 그리고 표절 등에서 비롯됐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일제의 병탄과 지배를 축복이라고 하면 보수 우파가 되며, 자주독립을 위한 항쟁에 주목하면 진보 좌파가 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파괴한 행위를 눈감으면 보수 우파이며, 이들에 비판적이면 진보 좌파가 된다. 우파의 이념적 지주인 민족·자주를 앞세우면 좌파가 되고, 우파가 터부시하는 매판과 외세 의존에 적극적이면 보수가 된다. 이 기준에 따르면 구한말 최익현 선생은 좌파이고, 매천 황현은 진보주의자가 된다. 망발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골수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을 배척한다. 그가 이끌던 임시정부도 따돌린다.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김구 선생의 초상을 지폐의 초상으로 삼는 걸 한사코 반대하고, 이런 민족주의자들을 이 잡듯 잡아 일제에 넘긴 백선엽 등은 우상화한다. 그들에게 진보-보수, 좌-우의 기준은 다름 아니라 두 독재자의 선호 여부였던 것이다.
독재자는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아사드(시리아)처럼 독재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1년 말 세기의 독재자 15명을 선정했다. 카다피, 후세인 무바라크(이집트), 폴 포트, 이디 아민, 모부투(자이르), 바티스타(쿠바), 뒤발리에(아이티), 마르코스(필리핀), 살라자르(포르투갈), 스트로에스네르(파라과이), 밀로셰비치(세르비아), 차우셰스쿠(루마니아) 등. 세계의 어느 보수 정당도 이들을 보수·우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사이비 보수·우파는, 일제든 독재자든 최고 권력을 쥔 자와 주류 집단에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추종하는 특성을 보인다. 파리의 촛불시위가 주군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협박했던 김진태 의원 같은 이가 그런 부류다. 지금 우리 사회의 충돌은 이런 좌-우, 진보-보수 사이가 아니라, 이런 전체주의자와 민주주의 세력 사이에서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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