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미시시피 강과 같은 길고 큰 강의 주변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집’이 실제로 존재한다. 큰 홍수가 난 이후에는 드물게, ‘나무 위에 보트’가 올라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제프 니컬스의 신작 <머드>의 도입부는 이렇듯, 세상에 일어날 법하지만 사람들이 관심 갖지는 않는 경계의 사태들이 강조된다.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도 ‘머드’다. 흙도 아니고 물도 아닌 진흙의 캐릭터 머드는 강 가운데 무인도에서 사람들을 피해 숨는다. 영화를 보며 머드를 연기하는 매슈 매코너헤이의 행색이 너무 남루해서 놀랐다. 여자친구 주니퍼 역을 맡은 리스 위더스푼 역시 우리가 기대하던 금발의 미인이 아니라서 실망했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마치 핀란드 감독 카우리스메키의 <빈민 삼부작>에서 막 튀어나온 듯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낡고 너저분한 경계의 인물들이 완성하는 드라마는 다름 아닌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결혼이나 이혼, 행운이나 불운, 생산물이나 폐기물 등으로 세상을 분류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혹 버려지더라도 다시 보듬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사랑을 추구한다. 영화는 강바닥에서 건져 올린 선풍기를 재활용하고, 삼촌을 아버지라 여기며, 쓰레기 더미에서 고른 부품을 활용해 보트를 완성해내는 내용을 담는다.
나열하고 보니 <머드>의 구성원들은 엘지비티(LGBT,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영화 속에서 보았던 인물들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세상이 정한 법칙에 저항하고, 다수의 권위를 이겨낸 사람들의 속성 말이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용어를 빌리면, 이 영화의 구심점은 한마디로 ‘폐기’(아브젝시옹)이다. 경계에 서 있는 것, 법칙을 무시하는 것, 혹은 중간적이거나 복합적인 폐기의 예는 ‘시체와 휴지, 혐오물’을 들 수 있다. 시체가 인간인지 아닌지는 딱 잘라 단정하기 어렵다. 휴지가 사회의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도 정의 내리기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폐기들의 속성을 무시하는 것도 최선은 아니다. 대개 사람들은 아브젝시옹을 특정 영역 밖으로 밀거나 규정해 몰아내는데, 아마 그편이 더 쉽게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믿어서일 것이다.
포털 뉴스에 등장하는 서울시장이 노숙인 동계 시설을 점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진 밑에 달린 ‘쓸데없는 관심’이란 댓글을 읽는다.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단지 성소수자들만은 아니다. 장애인과 노숙인, 이주민들도 포함된다. 만일 이들을 사회적 아브젝시옹이라 칭할 수 있다면, 이 방치된 부분을 활용하는 것이 진정한 합리적인 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 <머드>의 경우, 과거와 현재 이야기들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마침내 성장담은 완성된다. 영화는 어른들의 과거를 성장하는 소년들이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비로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경계의 속성을 통해 이야기 속 아이들은 성장하게 된다.
올해 초부터 꾸준히 ‘창조경제’란 모호한 단어를 뉴스에서 듣는다. 누군가는 스타벅스와 애플의 성공이, 그리고 가수 싸이의 행보가 그 예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2013년과 2014년의 경계에서, 그리고 여전히 2030세대의 일원으로서, 나는 영화 <머드>를 보며 생각한다. 진흙과 같은 오물에서 창조에 대한 꿈을 읽는 것이 진정한 발견이라고 말이다. 우리 세대의 역할이, 남들의 과거처럼 외향적 영광에 강박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것이라고 믿어보기로 한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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