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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2인자 / 김이택

등록 2013-12-10 19:04수정 2013-12-17 10:09

1953년 3월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죽은 뒤 유력한 후계자로 베리야가 떠올랐다. 비밀경찰 격인 내무인민위(NKVD: KGB의 전신)를 15년간 장악해온 실질적인 2인자였다. 미국의 기술정보를 빼내 원자탄 제조에 성공한 것도 그의 자랑거리였다. 6월 동베를린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공산당 내부에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조건으로 독일 통일 용인과 볼셰비즘 폐기까지 검토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경쟁자들에 의해 숙청의 빌미가 됐다. 같은 달 긴급소집된 당 정치국 회의에서 당서기 흐루쇼프(흐루시초프)는 동석한 베리야의 즉각 해임을 발의했고, 무장 군인들이 현장에서 그를 체포해 끌고 나갔다. 결국 6개월 뒤 반역죄로 총살됐다.(<각국의 정보기관>)

엊그제 장성택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이 공교롭게 당 정치국 확대회의 석상에서 군복 차림의 인민보안원들에게 끌려나가는 이례적인 장면이 북한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아무리 고모부라 해도 권력 안정이 필요했던 젊은 지도자에게 2인자는 위험한 존재였던 셈이다.

선거제도가 없는 1인 또는 1당 독재 아래서 2인자의 지위는 항상 불안하다. 권력 안정에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고 권력자 사후에도 쉽게 후계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은 같은 고향의 5년 후배이자 장정을 함께 한 류사오치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한때 2인자로까지 중용했다. 그러나 1962년 대약진운동 실패 뒤 ‘좌경화’를 비판하며 마오의 역린을 건드린 게 몰락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문화혁명 기간에 주자파로 몰려 마오로부터 ‘독초’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연금생활 2년 만에 다시 허난성 모처로 옮겨져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북한의 김일성 역시 1950년대 초반 연안파 무정과 소련파 허가이에 이어 남로당 출신의 박헌영마저 제거함으로써 1인 체제를 굳혔다. 김정은 체제도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을까. 판단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관련영상] [한겨레 캐스트#210] '장성택 숙청', 북한은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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