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논설위원
장성택이 처형되자, 보수가 진보에게 시비를 건다. 입만 열면 인권과 정의를 외치더니 왜 말이 없냐고. <조선일보> 칼럼은 아예 ‘비겁한 침묵’이라고 이름까지 지어줬다. 야당 쪽의 대응 유형은 세 가지다.
첫째는 김한길 방식이다.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북한 공포정치의 실상에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꼬박꼬박 하는 모범생 같다. 고분고분하니 좋아하는 건 보수 쪽이다. ‘이제야 상식적인 발언이 나왔다’는 반응이다.
둘째는 유시민 방식이다. 김정은이나 박근혜나 다를 바가 뭐 있느냐는 얘기다. 역시 싸울 줄 안다. 열혈 지지자들을 몰고 다니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하지만 남과 북을 같은 수준으로 보니 되치기당할 소지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종편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유시민은 북한에서 살 생각이 있느냐’고 역공을 편다.
셋째는 이정희 방식으로 입을 다무는 건데, 여기에 대해선 나도 입을 다물겠다. 대신 나라면 이렇게 대꾸하겠다. “장성택이 처형되는 걸 보니 김정은이 진짜 폭군 맞네. 그런데 남한도 얼마 전까지 그랬어. 그랬던 남한을 민주공화국으로 바꾼 건 민중이야. 민중이 피 흘려 싸울 때 너희들은 뭐 했지? 비겁한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라고.”
정말 남이나 북이나 하는 짓이 참 판박이였다. 북의 박헌영과 남의 조봉암이 받은 혐의는 똑같다. 미제의 스파이냐, 북한의 간첩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최후의 다급했던 순간도 비슷하다.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그 이론가 어떻게 됐어?” 하면서 증거가 있건 없건 그날 안으로 박헌영을 죽이라고 명령했고, 박헌영은 어느 산중에서 권총 두 방을 맞는다. 조봉암도 1959년 변호인단이 신청한 재심 청구를 대법원이 기각하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해 버린다. 정확히 18시간 만이었다. 그래도 박헌영은 체포돼 처형될 때까지 3년 넘게 걸렸는데, 조봉암은 구속 후 1년 반 만에 모든 것이 종료됐다.
하지만 남과 북의 역사는 그 직후부터 갈리기 시작했다. 북조선의 인민은 무기력했지만, 남한의 민중은 4·19를 일으켰다. 조봉암을 찍었던 216만표도 그 의거의 함성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 뒤에도 김성곤, 길재호, 김형욱 등으로 피의 숙청은 이어졌지만, 차마 김대중은 죽이지 못했다. 일본에서 납치해 태평양 한가운데에 내던지려 했지만 미국이 눈치채자 부산에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대놓고 김대중을 수장했다가는 치러야 할 후과가 두려웠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미 6·3사태와 70년대 학생들의 저항운동에 계속 시달리고 있던 처지다. 박정희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도 결국 민중의 힘이었다. 최후의 방아쇠는 김재규가 당겼지만, 김재규를 움직인 건 부산과 마산의 성난 시민들이었다.
전두환이 김대중에게 내란죄를 뒤집어씌워 사형 선고까지 하고도 죽이지 못한 것도 광주의 힘이다. 레이건이 사형 집행을 말렸다고 하지만, 정작 김대중은 청주교도소에서 ‘레이건이 당선됐다’는 소리에 넋을 놓고 발을 뻗은 채 울었다고 한다. 레이건이 인권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레이건이나 전두환이 두려워한 것도 민중의 분노였다. 1987년 6월항쟁을 거치고 나서는 이제 정적을 살해한다는 건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됐다.
지금의 남한을 북조선과 달리 민주공화국으로 만든 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아니라 민중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비고비마다 폭군 편에 서 있거나 딴청을 피우던 사람들이 이제 와 민주공화국의 주인 행세를 해댄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가 누구더러 비겁하다는 건지 혀를 찰 일이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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