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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현현 / 이유주현

등록 2013-12-22 18:43수정 2013-12-24 09:33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지난 4월 방글라데시에서 의류공장이 무너져 1127명이 숨진 이후, 옷을 살 때마다 원산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를 보면 주간지 <타임>에 실렸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꼭 껴안고 있던 남녀의 주검이 생각났다. 그들의 주검은 이미 부패를 시작해 푸르뎅뎅하게 부풀었지만 서로의 팔을 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샀던 옷들 중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었다. 서구의 의류회사들이 요구하는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벽에 쩍쩍 금이 가는 위험한 건물에서 일했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조선족 장률 감독이 만든 다큐영화 <풍경>을 보았다. 여기엔 우크라이나·필리핀·캄보디아·베트남 등지에서 온 노동자 14명이 등장한다. 이들이 한국에 와서 꾼 꿈 중 가장 기억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심심한’ 내용이 영화의 뼈대를 구성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란 점은 우리가 ‘국산’으로 알고 소비하는 갖가지 상품들, 삼겹살·채소·옷감·자동차부품·책장 등등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한국산 상추에 고기를 얹어 먹을 수 없고, 토종 박달나무로 만든 목공예품도 구경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이런 것들을 만들고 있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대다수 한국인들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삶은, 도시든 농촌이든 한국 텔레비전에 나오는 익숙한 풍경엔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콕 박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국산’을 만들고 있었다.

2013년을 보내며,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작동 방식에 대해 생각해본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만이 사람과 국가의 중대사를 해결할 수 있다. 진리는 항상 호전적이다. 그래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역시 투쟁적이어야 한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즉위 후 9개월 동안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들,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 유럽에서 천대받는 이민자들을 위로하며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스스로를 낮추는 자애로운 모습만이 그의 전부일까? 교황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혁 조처들을 감행했다. 교황청 내 재정 범죄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 재정당국과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로 합의했고, 최근엔 공공연하게 낙태와 동성애를 반대한 보수 성향의 미국 추기경을 전격 교체했다. 그는 종교가 정당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존경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월 <워싱턴 포스트> 등은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여성 신도의 발을 씻기는 등, 전임 교황들의 신중한 모습과 달리 파격적 행보를 보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보수 가톨릭 신자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교황이 몸소 증언하듯, ‘진리의 호전성’을 실천하지 않고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로할 수도, 알릴 수도 없다.

최근 잔잔하게 또는 격렬하게 번지고 있는 ‘안녕하세요’ 대자보 운동은 우리 곁에 상존했으나 인지하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오랫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던 한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인들 가운데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이가 박 대통령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시민들이 서로 안녕하냐고 묻는 인사 속에 담긴 뜨거운 분노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지율이라는 숫자 속에 갇혀 그가 보지 않았던, 또는 보고 싶지 않았던 세계에 대해서도 안부를 묻길 간절히 바란다.

이유주현 국제부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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