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젊은 시절 언젠가 자취방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있다. 그날따라 크리스마스이브를 같이 지낼 이가 없다는 게 참 쓸쓸했나 보다. 반지하 단칸방에서 밤늦게까지 홀로 소주를 들이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젊은 시절 대부분의 크리스마스는 블루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에 애인이 없다는 게 큰 잘못도 아닌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에 내가 메리하든 그렇지 않든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됐을 즈음에야 깨달았다. 대부분의 청춘에게 크리스마스는 블루하다는 것을. 인생이 그렇듯 누구나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블루 크리스마스이기 마련이다.
또한 크리스마스가 애초 ‘남녀상열지사’를 권하는 날이 결코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무려 2천년 전 아무도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인류에게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르쳐준 예수를 기리며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는 날이 크리스마스다. 먹고 즐기는 우리의 이상한 크리스마스 풍속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별로 없다.
젊은 시절 고독은 작가를 키우는 자양분이고, 노년의 작가에겐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고독은 청춘의 특권이다. 고독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성숙하는 사람은 없다.
요즘 페이스북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온통 행복한 이들로 가득 찬 듯하다. 맛있는 음식 사진을 올려놓는 이른바 ‘먹방’이 유행이고, 다양한 만남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외국여행을 즐기는 이야기도 흔하다. 의인과 열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에스엔에스에 비친 모습과 실제 현실은 많이 다르다. 현실이 구차하다 보니 사람들은 에스엔에스에서라도 위로받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고독도 사치다. 초·중·고를 거쳐 대학, 직장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경쟁만이 있을 뿐이다. 경쟁은 극소수의 승자만을 위한 것이다. 나머지 모두에게는 패자의 쓰라림만 남는다. 고독이 차라리 낭만적이라면, 현실의 좌절과 혼돈은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이다.
젊음이 아름다운 건 그런 긴 터널을 뚫고 나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젊음은 때론 나락이라고 생각되는 곳까지 떨어졌다가도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와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를 붙이는 젊음은 그래서 힘이 있다. 자기 앞가림도 하기 어려운 시절 투박하지만 담백하게 주변을 향해 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아름답다. 성찰하는 목소리는 비록 혼자여도 그 울림이 크다. 아니 혼자여서 더 힘이 세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열두 사도의 맏형인 베드로의 후예다운 것은 그가 청소부, 노숙자, 실업자, 난민 등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교황의 목소리가 세계를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것은 그가 높고 힘센 자리에 있어서가 아니라 깊고 낮은 성찰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이 말하길, 혼자 먹는 밥의 맛을 아는 이는 육체노동자이거나 시인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맞아 가끔은 블루해져 보는 건 어떨까. 화려하고 떠들썩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우울하지도 않은 고적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교황 프란치스코가 몸소 실천하는 것처럼, 세상의 낮고 깊은 곳으로 다가가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연말연시로 흥청대는 거리를 조용히 거닐거나, 어느 심야영화관에 들어가 슬픈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요즘 유행하는 영화 <변호인>을 보며 눈시울을 적셔보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찬란한 고독 속에서 맑고 투명해진 영혼들이 하나하나 모여 이 배반의 시대, 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횃불로 타올라도 좋다.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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