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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2013년 겨울 광화문 부근

등록 2013-12-24 19:14수정 2018-05-11 15:15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시절은 어수선하고 날씨는 차갑다.

아침 산책길에 우리 동네 좀 정신 나간 아주머니가 커다란 가방을 양쪽에 들고 양지쪽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아줌마, 오늘은 이 동네에서 노네’ 하고 말을 건넸더니 별말을 다 듣겠다는 듯 ‘놀긴 바빠 죽겄구만은’ 하면서 가방을 추스르고 어디론가 급하게 걸어갔다. 뒤에 대고 뜬금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허공으로 날아갔다. 안 바쁜 적이 없었던 아주머니다. 옷에 온갖 메달과 배지를 달고 다니는 아주머니는 말을 걸면 수선스런 동작으로 서류를 꺼내서 이렇고 저렇고 말하는데 그 서류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상당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정신줄 놓아버린 듯 횡설수설이라 알아들을 수 없다.

앞집 폐지 아주머니는 날씨가 추운데도 종이 주우러 나선다. 연립주택 지하에서 집도 정갈하게 치워놓고 외출할 땐 예쁘게 화장도 해서 얼핏 보면 부잣집 마나님 같다. ‘놀면 뭐해’ 하면서 폐지를 줍는다. 작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올해 들어 걸음걸이가 시원찮아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좀 무거운 폐박스는 한 발로 쓱쓱 차서 옮기며 절뚝절뚝 골목길을 누빈다.

경복궁 옆 7번 출구 앞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별로 실해 보이지 않는 곡식과 야채를 꾸러미꾸러미 놓고 팔던 할머니는 요즘 보이지 않는다. 아주머니 몇 살이세요 물으면 하나밖에 안 남은 윗니를 드러내 보이며 여든너이 하시던 분이다. 아이고 영감님은 어떻게 하고 물으면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벌써 뒈졌어 평생 고생만 시키고 뒈졌어 지금이 좋다고 하신다.

잘생긴 중년의 노숙자 아저씨는 비닐봉지에 온갖 것을 넣고 다닌다. 한쪽이 죽 찢어져 있는 홑바지와 두꺼운 외투를 사시사철 입고 다닌다. 여름에는 바람이 슬슬 들어가 시원해 보이지만 윗도리는 두꺼운 파카라 덥다 싶었다. 구멍가게에 들어가 무슨 카드를 내밀며 마실 것을 사먹기도 했는데 겨울이면 추위를 피하려고 온종일 작은 가게에 죽치고 있어 주인아주머니가 보다 못해 카드 안 받는다고 했더니 주무대를 바꾸었는지 눈에 안 띈다.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문밖에서 쪼르르 소리가 나서 옳지 이제야 잡았다 싶어 얼른 대문을 열고 나가 여기서 오줌 누면 어떻게 해요 하고 소리 질렀더니 막일꾼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급히 바지춤을 추스르며 고개를 백배 조아리며 미안합니다, 처음입니다, 하도 급하고 볼일 볼 곳이 없어서 중얼거리며 바삐 사라진다.

잘 아는 작가가 경향신문 앞에 서 있다 돌아왔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도 덩달아 경향신문 앞에 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 20년 동안의 등하굣길이었던 그곳은 쑥대밭이 되었고 상황 끝이었다. 인터넷을 연결하였더니 경쟁체제 운운하고 있다. 뚜렷한 고정수입 없이 혼자 사는 후배 하나는 가끔 전화 걸어 뭐 먹고사니 하면 ‘밥’이라고 한마디 한다. 어떻게 지내냐고 다시 물으면 ‘잘’ 딱 이렇게 두 마디만 한다.

세상 밥 먹고 사는 일, 너무 어렵다. 밥이 하늘이라고 한 동학, 하늘이 사람이고 하늘이 밥이고… 냉장고 냉동고에 가득 쟁여놓은 음식물들을 들여다보며 혀를 찬다. 한승원의 <겨울잠 봄꿈>은 전봉준이 일본군한테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전봉준은 동네에서 강제로 뺏어온 돼지로 끓인 국물을 죽지 못해 먹으며 밥이 하늘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

크리스마스라고, 기쁘다 구주 오셨다는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는데 기쁘지도 않고 평안하지도 않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일자리가 없으면 인간의 존엄성도 없다고 했다. 주님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소서 우리에게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우리에게 밥을 주소서 우리에게 밥을 얻기 위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와 같은 말이다. 밥을 위한 일자리를 위한 싸움은 하늘의 뜻이고 사람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 추운 겨울, 밥을 찾아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싸우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내리고 그럼으로써 이 땅엔 평화 하늘엔 영광이 있기를…. 따뜻한 밥 한 그릇, 따뜻한 옷 한 벌, 따뜻하게 몸을 누일 곳, 그것으로 모두가 족하기를….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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