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작가
십년쯤 전, 이천년대가 중반으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나는 이십대가 됐다. 유행에 민감한 동시에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미셸 푸코를 언급하기를 꺼리기 시작하던 시기,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의 유행이 끝물에 이르고 슬라보이 지제크나 알랭 바디우가 슈퍼스타가 되기 직전, 아주 잠깐 사람들이 발터 베냐민과 그의 도시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유행에 동참했다. 오래전 나온 그의 책들은 절판 상태였고 대표작들은 출간 전이었다. 학교 도서관 한구석에서 그의 영어판 글 모음집 <일루미네이션스>를 발견했다. 읽지도 못하는 그 책을 괜히 꺼내 접었다 폈다 하곤 했다.
그의 글 주제는 하나같이 세련됐다. 당장 아무 패션잡지에 실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문장은 매혹적이었고, 흑백사진 속 심각한 얼굴로 책에 파묻힌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극적인 삶의 궤적이 나를 끌어당겼다. 2차대전의 한복판, 히틀러가 전 유럽을 차근차근 손아귀에 넣는 동안에도 그는 미완성이 돼버린 작업 <파사젠베르크>의 메모 뭉치를 끌어안은 채 파리를 떠나지 못했다. 도피를 결심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끝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자살했다.
절박함으로 가득한 그의 삶에 빠져든 것은 아마도, 그 시기 내가 느끼던 시대의 공기가 정반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내 삶이 망했다고 거의 확신했다. 그런데 시대의 공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낙관적이었고, 미심쩍은 풍요가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뭔가에 취한 것처럼 보였고 동시에 권태로워 보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 같은데 거리로 나가면 세상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오직 나만 망해가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그래서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은밀히 또 간절히 바랐다. 폭동 같은 게 일어난다면 맨 앞에 서겠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 나는 자주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서 더 강박적으로, 탐미적으로, 베냐민이 산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그 시기 유럽의 공기를 소비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좋겠다. 그러니까 전쟁이나 학살 따위가. 제발. 일종의 리얼함을 나는 느끼고 싶었다. 권태로운, 인공적인, 하여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 공기를 누군가 박살내줬으면 싶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중2병’ 식의 배부른 소망은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내가 들이마시는 시대의 공기는 몹시 탁해졌고 또 희박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편,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을 정말로 좌절하게 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어느 다른 시대의, 혹은 어느 다른 나라의 어설픈 복사본이거나 덜떨어진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그저 혼란스럽고 바보 같을 것임이 자명해 보인다. 스페인 국경의 음독자살 같은 멋진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처럼 죽거나, 혹은 개같이 살아남거나.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처한 가장 큰 곤경이다. 절망조차 우습다는 것. 그것은 지금 여기 일말의 인간적 존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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