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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총장 인재 추천제’ 획일성 강화로 흐르지 않기를!

등록 2014-01-21 18:46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990년대 이래 직원 채용 트렌드를 주도해온 삼성그룹은 지난 15일, 대학 총장들에게 인재 추천권을 부여하겠다는 안을 발표했다. 현장에서 수시로 인재를 찾겠다는 방침으로, 아울러 입사 사교육 시장이 형성돼 사회적 부담이 가중됨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따로 돈을 들여 입사 스펙 쌓기에 골몰해온 취업 준비생들에게 충격이 될 소식일 테지만 획일적 스펙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면에서는 고무적인 행보다. 그런데 실제 그럴까? 30여년을 대학에서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총장 인재 추천제라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쩐지 미심쩍은 것은 왜일까?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채용 시기가 오면 학과 교수들은 졸업 예정자들의 취직 추천에 신경을 많이 썼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성향과 자질, 가정 형편까지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고 특히 학생들의 신상을 소상히 아는 교수들이 있어 적절한 추천을 할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그런 교수들은 연구는 좀 소홀히 하는 편이지만 학생들을 자상하게 돌보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지금처럼 교수도 끊임없는 연구 업적을 내야 하는 경쟁적 풍토였다면 그런 자상한 교수들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학생들을 자상하게 돌보고 싶은 교수들은 지금도 많다. 그러나 연구에 대한 압박이 강한데다 대학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점점 강의를 대형화하고 있기에 학생들을 알아가기 어렵다. 이런 현실을 알고 삼성은 ‘대학 추천’ 또는 ‘학과 추천’이 아닌 ‘총장 추천’이라는 단어를 쓴 것일까?

현 상태에서 ‘총장 추천제’가 시행된다면 어떠한 방식이 될까? 대학이 기업을 대신해 제때 외국 유수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오게 하고, 적절한 인턴십을 거치게 하며, 학점이 만점인 학생들을 선발해주는 것일까? 교수들이 수업과 과외 활동 등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익히 알아온 자기 학과생을 추천하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대학의 기준에 따른 스펙 관리에 철저한 학생들이 선발될 것이다. 이번 학기에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 매우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노고4리’ 밴드는 해당 사항이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4학년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노고4리’라는 밴드 이름으로 활동 중인 이들은 아주 탁월하지만 대부분 창의적인 학생들이 그렇듯 학점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총장 추천을 받는 학생들은 대입 난관을 어렵게 통과한 후에도 쉬지 않고 노심초사하며 학점 관리를 완벽하게 해낸 노력파일 가능성이 높다.

기업들은 곧잘 창의력과 도전 정신을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학점 관리를 잘하는 학생들을 선호하는 게 아닐까? 이제 이것을 좀 명확히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학생들 사이에는 삼성맨이 되는 것은 “자기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돈을 많이 버는 사위, 아들, 남편, 친구를 모두들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은 강도 높은 노동의 기계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정보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6대 기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특출한 인재’는 소수면 되고, 이미 그런 인재는 글로벌 차원에서 수시로 스카우트해 왔다. 이들은 가족 배경을 포함한 모든 요건을 두루 갖춘 자신감 넘치는 인재들일 것이다. 삼성이 총장 추천으로 뽑고 싶은 인재는 그런 면에서 창의적 인재라기보다 ‘위’에서 내려보내는 업무를 말없이 해낼 지구력 있고 순응적인 일꾼일 것이다. 개인 생활을 포기하고 성과 압박에 시달릴 각오가 된 ‘인재’를 찾는 것이 목적이라면 ‘총장 추천제’는 기업의 채용 부담을 줄이며 원하는 것을 얻을 효율적 선택임에 틀림없다.

삼성의 ‘인재 입도선매’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탁월한 인재들은 ‘총장 추천제’로 차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21세기 한국에서 말하는 ‘탁월함’의 그 진부한 평범성이 염려스럽다. 대학은 많이 변했고 더 이상 창의적이며 탄력적인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 대학과 기업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율성을 가질 때 상호 성장이 가능하다. ‘총장 추천제’라는 단어에서 삼성의 미래나 국가의 미래 못지않게 대학의 미래가 걱정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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