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임순례 감독의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는 이마리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주민등록증을 찢어라!>(2001)가 언급된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는 배우 김윤석이 연기하는 ‘최해갑’이다. 시비에 얽혀 파출소에 끌려간 상황에서 해갑은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며, 작품에 가위로 주민증 100여개를 자르는 상황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열세 자리의 긴 숫자를 어떻게 외우냐며,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무용론을 펼친다. 해갑의 캐릭터는 이른바 아나키스트다. 변화무쌍한 무정부주의적 사유를 지닌 인물로, ‘광기’와 ‘정상’의 범주를 넘나드는 것이 그의 매력이다. 임순례의 영화에서 이 주인공은 결국 섬으로 들어가 자립적으로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영웅이나 순교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는 ‘개인적 유토피아’를 실행할 정도의 파괴력은 지녔다."
요즘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사회가 시끌벅적하다. 덕분에 주민등록증에 담긴 숫자들이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지, 연일 쏟아지는 뉴스를 통해 ‘내 번호’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주민번호에는 생일과 성별, 출생지와 신고지 등의 중요 정보가 압축돼 있다고 한다. 2008년 옥션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 때보다 이번이 더 민감한 이유는 노출 대상이 신용카드사라서다. 각종 정보 브로커들에 관한 소문이 나돌고, 카드사는 유출로 인한 부정사용에 관해서라면 보상하겠다며 소리친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는 불어난 고객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20대의 후배들은 자신의 번호가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님을 인정한다며 반응조차 귀찮은 분위기다. 이런 와중에 현오석 경제부총리의 ‘어리석은 사람’ 발언이 들려온다. 인터넷에서 잡지 한권을 구입할 때조차 온갖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시대에, 과연 당신이 말하는 현명한 소비자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되묻고 싶다.
번호 유출에 관한 문제는 ‘정보의 순환과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된다. 이 고민의 층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정보의 도난이 계속되는 이유는 그 훔친 정보가 ‘돈’으로 환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나 음악, 문헌자료에 대한 저작권 문제는 일차적으로 자본의 흐름과 연관돼 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개인의 존재 가치’에 대한 판단과 연관된다. 예컨대 누군가의 존재 상태가 담긴 번호가 도난당했단 사실은, 그 사람에게 수치심을 안길 것이다. 작가의 예술혼이 담긴 작품의 무단 사용 역시 분노가 치밀긴 마찬가지다. 현오석 부총리의 발언이 일차적 상황만을 바라본 무심한 어리석음에서 나왔다면, 이제 살펴야 할 것은 이차적 가치들이다.
지난해 말 미국 법원은 ‘구글 북스’를 만든 구글에 대한 작가협회의 저작권 침해 소송을 기각했다. 이유로 그들은 구글 북스 프로젝트의 이점을 강조했다. 미국 법원의 판결이 절대적 해법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실적 방안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전문지식이 필요할 때 앉은자리에서 외국의 서적들을 검색할 수 있는 구글의 편리함은, 일단 경험하고 나면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편리한 시스템을 안전하게 유용할 방안을 강구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국작가협회는 항소할 계획을 발표했고, 그들의 행보는 당연한 이치다. 그럼 이제 우리의 상황이다. 최해갑처럼 주민등록증을 찢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면, 이 불쾌한 상황의 후속조처는 정부가 구체적 방안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책 한 권 사면서 필요한 것은 주소이지, 주민번호가 아니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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