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영화평론가
순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던 손을 멈췄다. 근육질의 아빠 추성훈이 인사동 거리를 걷던 중에, 그가 품에 안은 딸아이를 바라보는 모습에 시선이 박혔다. 짤막하고 삐뚤빼뚤한 앞머리에 홑겹의 눈을 감은 아이의 모습은, 모든 걱정을 앗아갈 듯 아름다웠다. 하정우로부터 시작된 소위 ‘먹방’(먹는 방송)의 유행이 이제 연령의 틀을 깨고 4살 아이에게까지 내려갔다. 그날 방송에서 사랑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가수 비를 만나러 갔다. 연예인의 개념이 생기지 않은 아이에게 비의 등장은, 만남만으로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이윽고 세 사람은 함께 식당으로 향했고, 그제야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사탕과 과자, 김을 깨무는 사랑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웠다. 편집자는 ‘비와 사랑이의 만남’에 초점을 둔 화면을 보여줬지만, 시청자의 관심은 ‘음식을 먹는 아이의 천진한 모습’에 있었다. 어떤 이야기 구성도 아이의 해맑음을 이기지 못했다.
국외 영화평론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벌레스크’란 단어가 있다. 벌레스크는 원래 문학 용어였는데 연극 등지에서 사용되다가, 현재에는 영화비평 분야에도 나름의 의미를 구축해서 사용된다. 가끔 외국에서 벌레스크영화가 수입될 때마다, 적절히 대체할 용어가 없어서 고민에 빠진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서 ‘음악극’이라고 표기할 때도 있고, ‘익살극’이나 ‘소극’으로 적기도 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중에서 하모니 코린 감독의 <스프링 브레이커스>가 벌레스크 장르의 작품이었다.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2013년 베스트 영화 10’ 목록에 이 작품을 포함시켰기 때문에, 하반기에 유난히 주변에서 많이 들렸던 제목이기도 하다. 물론 훌륭한 영화였지만 ‘올해의 영화’가 될 것이라 짐작하긴 어려웠다. 특히 벌레스크 영화의 전통이 없는 우리 비평 문화에선 판정하기 곤란하다.
벌레스크 영화의 기원을 살피려면 무성영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찰리 채플린과 로스코 아버클, 해럴드 로이드와 버스터 키튼’의 작품들은 슬랩스틱을 넘어 벌레스크란 명칭이 붙는다. 이들은 고상한 스타일로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고, 심각한 주제를 풍자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길 즐긴다. 이 거장들의 뒤를 ‘자크 타티와 시관원, 성룡’ 등이 잇는다. 알다시피 이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영화는 주제와 표현 톤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일상적 사회를 비추는 평범한 화면에 비해, 연기 패턴은 과장되고 화려하다. 가끔 코믹하면서도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플롯의 논리성을 따지지 않는다. 20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스토리의 전개 방식이다. 그렇지만 벌레스크 영화만큼은 플롯의 압박에 심각하게 구애받지 않는 편이다.
가끔 버라이어티쇼의 느낌을 받는 영화를 볼 때면 벌레스크와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된다. 역으로 <정글의 법칙>과 같은 ‘과정’이 중요한 예능을 보면서는 ‘드라마’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중점은 플롯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유명 연예인이 등장해서 애써 과정을 연결시켜도, 사랑이가 웃거나 귀엽게 음식을 먹을 때면 모두 잊게 된다. 이제 막을 내리는 소치올림픽을 볼 때도 마찬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흔히 스포츠를 일컬어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들 한다. 이 문장의 방점은 드라마에 있지 않다. 극화된 각본이 없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감동을 느끼고 흥분하는 순간은 가끔 예기치 않게 온다.
이지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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