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논설위원
검은 화면 사이로 깨알 같은 엔딩크레디트가 흐르는 동안 좀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예의 때문은 아니었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뻗은 이들이 이리 많다는 게 고마웠다. 길게 오래도록 흐르는 엔딩크레디트의 리듬이 참 포근했다.
집에서 제법 먼 복합상영관까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하 <약속>)을 보러 간 데는 의무감도 작용했다. 거친 영화일 거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택시 뒷좌석에서 엄마 품에 안겨 숨져가는 딸을 지켜보는 아버지 모습을 보는 순간 선입견은 깨졌다.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피해자인 황유미씨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다분히 논쟁적이지만, 절절한 휴머니즘에 바탕하고 있다.
노무현의 삶을 재조명한 <변호인>이 좋은 영화지만 <약속> 역시 그에 못지않다. <약속>은 지난 주말까지 44만여명을 동원했다. 스크린 축소 등의 잡음이 아쉽지만 저예산 영화로 이만하면 선전했다. <변호인>이 어찌됐든 잘난 사람 이야기라면 <약속>은 못나고 상처받은 사람들 이야기다. 택시기사 황상기씨가 삼성에 맞서 눈물겨운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다.
삼성은 우리 사회에서 야누스의 얼굴을 한 존재다. <약속>에 비친 삼성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노동자를 무력화시키려 드는 비정한 집단이다. 한편으로 삼성은 애플과 겨루는 초일류 기업이다.
삼성의 성취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군림하려 드는 그 안하무인격 행태가 걱정스럽다. 자본은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온 사회를 제멋대로 주물러 잇속을 챙기려 든다. 정·관계, 법조, 언론, 노동, 교육, 문화계를 가리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거액의 벌금을 문 삼성 비자금 사건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정·관계 로비 등 삼성의 구시대적 행태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 회장의 단독 사면으로 허무하게 끝난 이 사건 이후 삼성은 달라진 걸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을 끝으로 우리 사회에선 삼성에 대해 더 이상 비딱한 시선을 들이대기 어려워졌다. 삼성의 괴력 앞에 모두 순치된 것일까. 비리를 폭로하고 파헤쳐 재판에 넘겨도 끄떡없더라는, 삼성은 건드릴 수 없다는 현실론이 득세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 <약속>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삼성이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고, 때때로 그것이 노동자의 피눈물을 짜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삼성에 순치되어 가는 이 어지러운 세상에 삼성에 맞서 황유미씨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그린 이 영화는 마치 죽비와도 같다.
노무현 정부 시절 언젠가부터 청와대가 삼성에 포섭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삼성이 제기한 이슈들이 정책으로 채택됐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노무현의 정의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제왕적 대통령제 척결 등으로 나타났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 시대의 정의는 신자유주의 승자독식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거대기업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피폐한 삶을 개선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대선의 시대정신이었던 이유다.
재벌 문제는 시대적 정의와 직결된다. 삼성이 아무리 잘나가도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모두에게 해로울 수 있다. 거대기업과 중소기업, 소외계층이 더불어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삼성에 대해 건강한 비판의 날을 거둬들이는 순간 삼성도 위험하다. 미디어가 삼성의 성취에만 고무돼 그 어두운 이면을 수수방관하는 건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만약 노무현이 지금 살아 있다면 누구의 변호인이었을까. 아마도 시대의 법정에서 백혈병으로 숨져간 황유미씨의 변호인이 되었으리라.
백기철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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