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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노아의 외투 / 고명섭

등록 2014-04-13 18:49수정 2014-04-14 08:56

대런 애러노프스키 영화 <노아>의 바탕은 <구약성서> 창세기 6~9장에 실린 ‘홍수와 방주’ 이야기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의 말미(9장18~27절)에 뜬금없다 싶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술에 취한 노아 이야기다. 이 삽화는 방주 밖으로 나온 노아가 최초의 포도 농사꾼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옷을 다 벗은 채로 천막 안에서 잠이 든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목격한다. 함은 형 셈과 아우 야벳에게 사실을 알린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겉옷을 들고 들어가 몸을 덮어준다. 구약 창세기는 셈과 야벳이 나신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들어갔다고 써놓았다. 잠에서 깬 노아는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프랑스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자 필리프 쥘리앵이 쓴 <노아의 외투>는 이 이야기를 실마리로 삼아 ‘아버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펼친다. 요약하자면, 함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다. 옷의 진정한 기능은 치부를 가리고 위엄을 세워주는 데 있다. 벌거벗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다움, 곧 아버지의 위엄이 없다. 어린아이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절대적 권위로 무장한 존재다. 함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 아버지다움을 내던진 아버지, 상상계 밖의 실제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봐선 안 될 걸 봤으니 신성모독이다.

<노아>가 개봉되자 일부 기독교인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이 영화가 성서의 내용을 왜곡했다는 것인데, 반발의 심리적 이유에는 영화 속 노아가 노아다움의 외투를 벗어버렸다는 사실도 있는 것 아닐까. 성서의 노아와 달리 영화의 노아는 아들들과 극심하게 갈등하고 자기 자신과도 갈등하는 인간이다. 이런 내적 불화가 이 작품에 깊이를 만들어주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이 불화가 환상의 베일을 벗겨내는 폭력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어린아이의 상상 속에 머문다면 문화적 성인식은 오지 않는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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