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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폭력 사회

등록 2014-04-15 18:46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계급사회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다. 폭력이 없으면 불평등한 사회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의 유형에 따라 그 사회 내의 위계질서 유지를 위한 폭력의 형태도 달라진다. 계급의 발생 이후 오늘날까지 계급적 폭력을 시대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골적이며 신체적인 전통사회의 신분적 폭력은 평민 이하의 신분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야 했다. 노예나 농노가 주인의 채찍을 일상적으로 두려워해야 했던 것이다. 정의를 가장한 지배자들의 폭력이 그 지배자들에게 ‘위엄’을 높여주는 것은 전통사회다.

18~19세기 부르주아 민주혁명 이후에는 적어도 ‘시민’의 타이틀을 단 유럽 사회의 주류, 즉 중산층 이상의 백인 남성 성인들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했다. 커다란 진보임에 틀림없지만 문제는 그들의 신체적 자유는 사실상 그들만의 특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가난뱅이나 흑인 등 식민화 당한 ‘유색인종’, 그리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여전히 신체적 폭력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의 각종 변혁운동들은 또다시 폭력의 지형을 바꾼다. 가면 갈수록 비주류에 대한 주류, 즉 ‘시민’계층의 폭력이 어려워진다. 내가 사는 노르웨이만 해도, 비서구인 이민이 시작됐던 1970년대에 유색인종들에게 대놓고 인종적 모욕을 하거나, 학교에서 이민자 자녀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폭력은 물론이거니와 인종적 폭언만 해도 벌써 소송감이다. 그 사이에 그만큼 신체 자유가 백인만의 특권에서 일반적 권리로 확산됐다. 학교든 집안이든 어린이에 대한 일체 체벌 등의 학대도 스웨덴에서는 1979년에, 노르웨이에서는 1987년에 각각 전면 금지됐다. 태어나자마자 어린이도 ‘시민’이 된 셈이다. 노르웨이 군대에서는 약 9%가 각종의 괴롭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물리적 폭력 피해율은 약 1% 정도이며, 심한 구타 등은 최근 수십년 동안 들어보기가 힘들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원자화된 개개인에게 공포를 안겨주고 경제적 생존을 불안하게 함으로써 경제적 폭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지만, 핵심부나 준핵심부의 산업화된 사회들은 과거와 같은 신체적 폭력을 점차 멀리하게 되는 추세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적어도 ‘시민’들에게 신체의 자유를 가져다준 민주혁명은-비록 미완의 형태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1987년에 일어났다. 박종철을 죽인 신체적 폭력은 그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미완의 혁명이었던 만큼, 그 효능도 당장 느껴지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민’이라고 할 정치범들은 계속 고문을 당해야 했지만, 김대중 집권 이후에는 사형집행의 정지와 함께 ‘시민’에 대한 고문도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한데 ‘시민’으로 개념화되지 않는 빈민 출신의 ‘잡범’이나 탈북자 등 이 사회의 주변분자들에 대한 광의의 폭력이라 할 수 있는 강압수사 관행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물론 1990년대 중후반은 하나의 기점이 되어서 한국 사회의 주변부도 점차 탈폭력화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94년만 해도 416명에 이르던 연간 군내 사망자(사고사, 자살,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 등을 포함하여) 수는 2000년에 이르러 182명으로, 거의 두배 이상 떨어져 그 뒤에도 계속 하강곡선을 그었다. 한국 사회의 병영화가 한창이던 1975년에 1555명이나 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커다란 개선이 아닐 수 없다. 2010년부터 진보적 교육감에 의해서 시작된 학생인권조례 공포는, 한국 사상 최초로 교내 체벌을 금지해 피훈육자의 신체를 훈육자의 ‘물건’으로 다루었던 관행을 깬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에서도 늦게나마 ‘시민’뿐만 아니라 사실상 ‘2등 시민’의 위치가 강제로 부여된 사회의 주변층까지도 점차 신체적 자유를 얻어가는 것이다.

‘시민’, 즉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 남성들은 이제 폭력의 악몽을 거의 벗어났지만, ‘시민’들이 하기 싫은 일들을 대신 해주고 ‘시민’들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 어린이, 빈민, 강제 징집당한 군인 등은 계속해서 그 악몽 속에서 산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분명한 것은, 탈폭력화의 조류와 함께 이에 대한 역류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민’, 즉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 남성들은 이제 폭력의 악몽을 거의 벗어났지만, ‘시민’들이 하기 싫은 일들을 대신 해주고 ‘시민’들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 어린이, 빈민, 강제 징집당한 군인 등은 계속해서 그 악몽 속에서 산다. 가난한 가정 출신의 한 학생이 체벌당해 결국 뇌사에 빠져 숨진 그 다음날에 교사의 학생 폭행이 계속 이어졌던 최근 순천 금당고의 사건이 잘 보여주듯이, 교육 현장의 훈육자들은 아직까지도 학생의 신체를 그 누구도 물리력으로 건드릴 권리가 없는 그 학생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로 어려운 가정의 출신들이 가는 학교나 일반 운동부 선수들의 (코치나 선배로부터의) 폭력 피해율은 지난 9년 동안 78%에서 28%로 뚝 떨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잊을 만할 것 같으면 돌연히 새로운 스포츠계 내지 체대 내 ‘폭력 사건’들이 또 터진다. 체대가 모델로 하는 군에서는, 젊은이들은 여전히 폭언과 폭력 속에서 지배자들이 원하는 ‘진짜 사나이’로 순치돼야 된다. “군 구타가 사라졌다”는 말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 며칠 전에 음식 먹던 한 사병이 선임병의 구타로 기도가 막혀 사망하게 된 끔찍한 사건이 벌어져서 세상이 다 알게 된 것이다. 매우 축소된 것으로 보이는 몇년 전의 조사 결과로 봐도 군에서의 구타 피해율이 14%에 이른다.

아주 걱정스럽게도, 군에서의 ‘진짜 사나이’들의 잔혹성은 오히려 극우 정권하에서 더 짙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권위주의 정권의 막바지인 1990년에 군에서의 연간 자살자는 172명이었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하의 구타 근절 캠페인 등이 주효해 2005년에 64명으로 줄었다. 일반 사회의 자살률이 급증했음에도 구타 근절에의 노력이 군 자살자 수를 축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요즘 몇년간 군 자살자는 다시 소폭으로 증가돼, 2011년에 97명이나 됐다. 도대체 몇명의 젊은이들이 폭력과 폭언 속에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이 사회가 만들어낸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다 접어 극단적 선택을 해야 우리가 ‘총력안보’가 아닌 생명과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학생, 운동부 선수, 여성, 징집당한 젊은이 등 이상으로 한국에서 신체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체벌당한 학생이나 구타당한 군인의 사망은 그나마 ‘뉴스’라도 되지만, 구타당한 외국인 노동자의 사망은 아예 보도되지 않거나 짧게 단신 보도된다. 지난 2월14일에 28살의 인도네시아 선원이 한국 어선에서 조업 중 구타로 사망했는데, 그는 배멀미를 지나치게 하고 몸이 약해 일을 못했다는 ‘이유’(?)로 상습 구타를 당해 결국 십이지장이 파열돼 복막염으로 죽은 것이다. 나도 학생 시절에 구타를 당해봤지만, 십이지장이 파열될 정도의 상습 구타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선원뿐인가? 외국인 선원들에게 한국 어선은 거의 해상 고문실처럼 체험된다. 언어폭력까지 포함하면 피해율은 94%에 이르며, 구타 피해율은 43%나 돼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내무반이라 하겠다. 한국 어선에서 피부색이 까만 외국인에 대한 폭력성의 정도는, 200년 전 미국 남부 백인들 목화농장에서의 흑인 노예들에 대한 폭력을 방불케 할 수준이다.

우리는 병영형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드문 주변자들에 대한 폭력은 이 사회의 주된 특징이다. 따라서 폭력 근절 투쟁은 궁극적으로 안보주의적 신자유주의와의 정면 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탈폭력화 시대에 한국의 ‘2등 시민’이나 ‘비국민’(외국인)들이 계속 최악의 신체적 폭력에 노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적 격차사회와 박정희식 군사문화의 중첩이라 하겠다. 돈과 ‘빽’이 있어 좋은 학교 가고 군에서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는 젊은이야 ‘시민’답게 신체적 자유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난한 외국인, 학생, 병사는 기합, 얼차려, 주먹놀림에 노출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우리는 병영형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드문 주변자들에 대한 폭력은 이 사회의 주된 특징이다. 따라서 폭력 근절 투쟁은 궁극적으로 안보주의적 신자유주의와의 정면 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사나이’들의 순치된 신체들이 경쟁적 돈벌이에만 몰입돼야 하는 곳에서는, 주먹이 계속 군림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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