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작 <세계사의 구조>에서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좀 생소한 주장을 편다. 흔히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라타니는 민주주의가 소아시아 해안 지역 이오니아에서 발원했다고 말한다. 이오니아에서 출현한 이소노미아(isonomia)가 민주주의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소노미아는 권리의 평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인데, 민주주의와 거의 같은 말로 통용돼 왔다. 민주주의가 아테네에서 자라났듯이 이소노미아도 아테네의 산물이라는 것이 표준적인 설명이었다. 그런데 가라타니는 한나 아렌트의 해석에 기대어 이소노미아를 민주주의와 명확하게 분리한다. 아렌트는 이소노미아를 비지배(no rule)로 번역했다. 민주주의는 데모크라시, 곧 인민(데모스)의 지배(크라시)이므로 지배의 한 형태이지만, 이소노미아는 지배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지배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가 이소노미아다.
이 이소노미아의 기원이 바로 이오니아에 있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이곳에 기원전 10~8세기에 그리스 본토 사람들이 이주해 수많은 폴리스를 세웠다. 이 지역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곳에 붙박여 강자의 지배를 받으며 불평등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자유로웠기 때문에 평등했던 곳이 바로 이오니아 도시국가였다. 이 이소노미아의 땅에서 탈레스(철학), 헤로도토스(역사), 히포크라테스(의학)가 나왔다. 훗날 이소노미아의 정신이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 그 풍토와 타협해 성립한 것이 민주주의였다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민주주의는 이소노미아의 불완전한 형태였다. 언제든 참주정으로 떨어지거나 데마고그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가라타니는 이소노미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민주주의도 못하는 판에 꿈이 너무 큰 것 아닌가. 그러나 사람은 꿈꾸는 동물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특권 지배가 계속되는 한,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의 꿈을 버릴 수 없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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