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고등학교 때였다. 수학 교사가 반 학생 전체를 체벌하겠다고 했다. 일부 학생들이 떠들어서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손에는 목도가 들려 있었고 학생들은 한명씩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폭행이 한창 진행될 때 나는 앞으로 나가 목도를 붙들었다. 그리고 긴장 때문에 갈라진 목소리로, 일부의 잘못을 이유로 전체를 처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항의했다. 교사는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학교 생활규정에 똑똑히 나와 있는 조항이었다.
학교는 규칙 준수와 질서를 강조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학교에서는 규칙이 무시당하고 힘센 자의 입맛대로 적용되는 일이 더 많았다. 최근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수원에서 열린 한 청소년 토론회에서는 드럼 스틱으로, 하키 채로 체벌을 당하고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차별이나 학교폭력을 신고했지만 묵살당한 일 등 사례도 쏟아졌다. 법령으로 체벌이 금지된 지 3년, 그것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4년차인 경기도의 이야기다. 올해 초에는 전남 순천에서 교사에게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있었다. 체벌이 상습적이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법은 지켜지지 않았고, 지침과 매뉴얼은 유명무실했다.
학교가 인권을 보장하고 법을 지키도록 감독해야 할 곳은 교육청이고, 교육부이고, 국가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손을 놓고 있다. 체벌금지를 적극적으로 알리지도 않고, 인권침해를 호소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야간자율학습을 강제로 시키는 교장을 고발했으나 학생의 성적을 향상시키려는 ‘정당한 목적’이었다며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한 적도 있다. 학교는 과중한 경쟁 부담과 비민주적인 구조 속에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지만 국가는 여기에 무관심해 보인다. 또는 무능해 보인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는 잠자코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학생들의 평화적 집회 참가를 방해하고, 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자 ‘철저하게 지도’하라고 공문을 보낸다.
보통 ‘의무’란 말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강제할 때 쓰인다. “국민의 의무”, “학생의 의무” 등.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 나서서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바로 국가가 책임지고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할 의무이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그 의무의 자리를 ‘자율화’나 ‘규제완화’ 같은 말들이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는 오히려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를 약화시키고, 소송을 걸고, 공격하고 있다. 얼마 전 교총은 박근혜 정부가 천명한 ‘규제완화’를 위해 없애야 할 것 중 하나로 학생인권조례를 지목했다.
그때 그 교사와의 충돌은 결국 나 혼자만 폭행에서 열외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 뒤에도 그 교사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가서 사과해야 했다. 그 교사는 “목도는 좀 심했었지?” 하며 웃었고, 여전히 규정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학교도 규정 위반으로 그 교사를 처벌하지 않았다. 큰 사고라도 터지거나 누군가 불이익을 각오하고 나서지 않는 한 책임자가 처벌받는 일은 드물다. 누군가 목숨을 잃기라도 해야 세상은 호들갑을 떤다. 그 지켜지지 않는 규정조차 완화하고 없애려고 든다. 우리가 끊임없이 국가의 의무를 이야기하고 혐의를, 책임을 묻는 수밖에 없다. 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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