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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재난, 인권 그리고 국가

등록 2014-05-27 18:14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21세기 들어 전세계에서 발생한 선박 사고 중 세월호 침몰은 사망자와 실종자 수로 따져 열번째 안에 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고들은 대부분 자연재해로 인한 경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02년 세네갈에서 르줄라호가 침몰하여 1863명이 희생되는 초대형 참사가 발생했지만 주원인은 폭풍 때문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소위 ‘인재’로 인한 선박 침몰 중 세계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대형 사고다. 거의 완전히 예방 가능한 일이었기에 비통과 분노가 이토록 큰 것이며, 사고의 성격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초보적이어서 허탈과 절망이 이렇게 깊은 것이다.

현대인이 경험하는 재난을 예전처럼 천재와 인재로 명백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소행성의 충돌과 같이 문자 그대로의 천재가 아닌 한 오늘날 완전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재해라 해도 인적 요인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특히 지구온난화가 인간 생산활동의 결과라고 할 때 이제 천재냐 인재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유엔의 재난경감국제전략에 따르면 재난(disaster)이란 위해와 취약성이 합쳐진 것이다. ‘위해’(hazards)란 인명을 살상하거나 생계와 재산에 피해를 초래하고 사회·경제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현상 또는 조건을 말한다. 토네이도 엄습, 화학물질 유출, 지하철 고장 등 수많은 사건들을 들 수 있겠다.

세월호 사건은 시스템의 취약성이 위해를 발생시킴과 동시에 그 결과를 증폭시켰으므로 이중적 인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취약성을 높였던 모든 주체들에게 재난 리스크를 증가시킨 책임이 있다. 만일 선장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다면 선박회사나 관피아나 해경이나 청와대나 대통령도 ‘살인’의 인과고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위해가 발생했다고 해서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재난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위해가 발생한 대상의 취약성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물리적·사회적·환경적·경제적 요인 때문에 어떤 집단이나 시스템이 위해 요인 앞에서 피해를 당하기 쉽게 되어 있는 상태 혹은 정황을 뜻한다. 똑같이 쓰나미가 덮쳐도 관광지 난개발로 맹그로브 생태계가 취약해진 연안지역 주민들이 특히 심한 피해를 입는다. 똑같이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재해를 당해도 가난하고 취약한 남반구 주민들이 전체 피해의 93%를 차지한다. 과적과 관리부실, 안전수칙 미적용, 선원들의 임무 방기, 관리감독 체계의 민관결탁과 부패, 지휘계통의 난맥상, 구조 당국의 무능, 재난 관리 대비의 결여, 정부 꼭짓점인 청와대의 무능과 무책임이라는 ‘취약성’이 합해져 세월호 침몰이라는 ‘위해’가 초대형 ‘재난’으로 이어졌다. 열거한 요인들이 정상으로 작동했더라면 침몰이라는 위해가 거대한 재난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시스템의 취약성이 위해를 발생시킴과 동시에 그 결과를 증폭시켰으므로 이중적 인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처럼 위해와 취약성이 양쪽에서 협공한 충격의 결과로서 재난이 ‘우지끈’하게 초래된다는 설명을 ‘재난 크런치 모델’이라 한다. 이때 인과관계 사슬에서 취약성을 높였던 모든 주체들에게 재난 리스크를 증가시킨 책임이 있다. 법적으로 직접 책임자를 가릴 수 있을진 몰라도, 재난 리스크의 누적과 방치라는 점에서는 직접 책임자나 간접 책임자나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다. 만일 선장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다면 선박회사나 관피아나 해경이나 청와대나 대통령도 ‘살인’의 인과고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취약성’을 악화시켜 재난 리스크를 높인 당사자들은 모두 인권 유린의 가해자이자 방조자이다. 이것은 눈물을 흘리든 해경을 해체하든 달라질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체르노빌, 카트리나, 멕시코만 원유 유출, 후쿠시마 등을 거친 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인권이 ‘재난의 경감 및 구호를 받을 권리’다. 재난 보호권이라고도 하는 새로운 인권이다. 재난 예방과 재난에 노출될 리스크를 줄여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솔직히 말해 위해 요인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근대성의 성격 자체가 그렇다. 따라서 취약성 요인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것이 재난 보호권의 핵심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을 복기해 보면 정반대였음이 드러난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재난 취약성을 높이는 정책을 취한데다 현 정부는 재난 발생 이후의 대처에서도 낙제점에 가까운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명박근혜 정부가 합작하여 돈 논리에 의해 재난 리스크를 한껏 불려 놓아 인권 유린의 적폐가 커진 셈이다. 재난 전문가들은 재난 발생 후의 손실 비용이 재난에 대비한 투자 비용의 약 7배 정도 된다고 한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이번 사건 후 대중들이 대한민국 헌법 10조를 인용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세계인권선언 3조는 더욱 직설적이다. “모든 사람은 생명, 자유, 인신의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원래 ‘인신의 안전’(security of person)은 자의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내 한 몸 지킬 자유를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재난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로 확대되었다. 이것을 위해 국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그것을 촉진하고 충족할 의무를 져야 한다. 이게 사회계약적 인권의 핵심이다. 세월호의 침몰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국가가 어디 있느냐고 고통스럽게 자문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국가가 시민의 생명, 자유, 인신안전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인권의 ‘기’가 팽팽히 살아있을 때에 재난 리스크가 줄어든다. 진정으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재난 대책이라면 사람들의 권한과 발언권을 북돋아 주고 인권이라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재난 리스크를 줄여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 재난 리스크의 경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접근이 있다. 첫째, 국가의 법령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재난예방 조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공급 측 조치가 있다. 하향식 국가계획 방식을 일컫는다. 둘째,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민간의 모든 행위자들이 재난 리스크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도록 돕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수요 측 조치로서 재난의 결과에 대해 시민사회가 국가에 책임을 묻는 인권의식을 키우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상향식 자력화 방식이라 한다. 상향식, 하향식 방식이 결합해야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수 있다. 전자의 전통적 방식은 후자의 새로운 방식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의 생명, 자유, 인신안전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인권의 ‘기’가 팽팽히 살아있을 때에 재난 리스크가 줄어든다. 노동자들이 위험작업중지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인권선언에서 사회의 모든 개인과 모든 조직이 인간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최근 대통령이 내놓은 조치를 보면 첫째 방안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징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통제의 느낌이 강하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학생들을 죽이더니, 또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국가개조라는 어마어마한 테제를 강요하는 식이다. 재난 전문가 어번 존슨은 시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촉진하지 않는 재난 대책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진정으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재난 대책이라면 사람들의 권한과 발언권을 북돋아 주고 인권이라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다른 모든 인권과 마찬가지로 재난으로부터 보호될 권리 역시 합의에 근거해야 하며, 하향식으로 강요되어선 안 된다. 왜 우리는 뼈아픈 고통을 겪은 후에도 인권 존중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최고집행권자가 자기 임무를 게을리해 법 규정이 유명무실해지면 결과적으로 정부가 해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법률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집행에 의해서 사회의 유대를 강화하고, 정치체의 모든 부분에 제각기 적절한 위치와 기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정부의 존재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패하여 세월호 참사를 빚었던 한국 정부가 대책이라고 제시한 것이 고작 원래의 실패를 되풀이하겠다는 내용이라니. 어찌해야 재난으로부터 인권이 보호될 수 있을 것인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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