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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식민지근대화론과 역사 쿠데타 / 고명섭

등록 2014-07-17 18:24

고명섭 논설위원
고명섭 논설위원
학술언어는 대개 정치적 함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몇 년째 우리 사회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식민지근대화론도 마찬가지다. 이 경제학 담론은 20세기 한국 경제사를 중립적인 언어로 기술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담론이 단순히 경제학적 의미만 안고 있다면 기득권세력이 그 내용을 어린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경제학 언어의 탈을 쓴 정치언어다. 이 나라 기득권세력이 자신들의 뿌리를 정당화하는 데 쓰는 담론 도구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대부는 경제학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다. 안병직 교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했던 학자다.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반봉건사회로 이해한 것인데, 이후 식민지근대화론자로 전향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이 지체되고 반(半)봉건적, 곧 전근대적 경제 체제가 온존됐다는 주장이다. 이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일제강점기에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이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 이론으로서 빈곤하고 협소하듯이 그 안티테제인 식민지근대화론도 똑같은 맹점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화를 곧 근대화로 보는 것인데, 그런 주장을 학설로 내놓는 거야 학문 행위의 자유이니 말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제강점기에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단순한 주장을 넘어 식민지를 겪지 않았으면 자본주의 발전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 20세기 초 한국 사회를 석기시대쯤으로 보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왜곡이다. 이런 왜곡을 거쳐 일제가 식민 지배를 한 덕에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괴이한 주장이 등장한다. 이 주장을 더 밀고 나가면 친일파야말로 식민지 근대화에 이바지한 사람들이 된다. 일제 마름 노릇을 하며 제 겨레의 피를 빨던 부역세력이 현대사 발전의 초석을 놓은 자랑스러운 일꾼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오물이 황금이 되는 놀라운 역사의 연금술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항일독립투사들은 일제의 근대화 노력에 발목을 건 시대착오적 훼방꾼이 되고 만다. 일제에 저항한 이들이 하루아침에 역사의 걸림돌, 겨레의 적으로 뒤집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에 대한 도발이 정점에 이른다.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뉴라이트니 정통보수니 하는 지식인과 정치꾼들이 획책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 반란을 수없이 보았다.

이 역사 쿠데타가 마지막에 노리는 것은 친일파의 태반에서 자라나온 해방 후 독재세력, 다시 말해 이승만·박정희와 그 아류들에게 근대화의 주역이라는 역사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이다. 독재세력을 옹호하는 이 논리의 가증스러움은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재의 폭압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세력을 근대화 방해 집단으로 몰 때 배가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최종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일제와 독재에 부역하며 기득권을 쌓아올린 무리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항일·반독재 세력을 헛것과 싸운 자들로 낙인찍어 쳐내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의 정치적 임무다. 일제 덕에 근대화 토대를 닦았고 독재 덕에 산업화에 성공했으니 친일이 옳았고 독재가 맞았다는 것이다. 학문에도 파렴치가 있다면 식민지근대화론이 바로 그렇다. 학술언어를 빙자한 이 정치언어가 뒤를 봐주니 친일·독재 후예들이 그토록 방자하게 역사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파렴치를 걷어내야 나라가 바로 선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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