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어렸을 적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건물에서 불이 났을 때, 천천히 차례로 나갔으면 다 살 수 있었지만, 서로 먼저 나가려다가 넘어지고 밟혀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사회학자 제임스 콜먼은 1903년 시카고의 한 극장에서 화재에 놀란 사람들이 배우의 통제를 무시한 채 서로 빠져나가려다가 587명이나 죽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신뢰가 여러 영역에서 효율을 낳는다고 말한다. 대학원 신입생 시절 콜먼의 글을 처음 접하고, 한국의 신뢰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음을 여러 지표에서 확인하면서, 나 또한 낮은 신뢰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사회적 자본’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상호 신뢰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옳은 말이라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런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려줬다. 실제 믿을 만한 정도 이상으로 조직이나 사람을 신뢰하면 크게 뒤통수를 맞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생존 학생들의 법정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학생들은 선박 지휘부와 해경을 믿고 따랐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분통이 터졌지만, 꾹 참고 가만히 있었다.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배운 것처럼, 냉정하게 질서를 지켰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차라리 시카고의 관객들처럼 지시를 무시한 채 나가려 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참으로 서글펐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신뢰가 낮은 것에 있지 않다. 신뢰, 특히 대정부 신뢰는 실제 그들이 받을 만한 수준보다 너무 높다. 오히려 정권에 대한 불신과 견제가 모자란 것이 문제다. 당연히 작동해야 할 관리감독과 구조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그것을 믿고 기다린 국민들이 사망한 최악의 배신이자 정부 실패를 ‘해양교통사고’라 말하는 국회의원을 보자면, 분노를 넘어 답답함이 밀려옴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불신과 항의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더불어,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그 여론을 뒤집어버리는 인상적인 ‘삽질’로 상대에게 재보선 승리를 안겨주는 야당을 보자면, 정권 견제를 위해 세금으로 월급까지 챙겨주는 이들조차 신뢰할 수 없음을 확인한다. 신뢰가 제 기능을 하려면, 높은 도덕적 합의와 원리원칙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불신과 항의를 통해 만들어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땅에서 불신과 항의 없이 알아서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진상 조사를 하자는 특별법조차 유족분들의 절실한 항의로 겨우 논의되는 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불신과 항의인 듯하다.
수없이 뒤통수를 치면서도 믿어 달라 한다. 심지어 믿지 않는 것이 우리 문제라고까지 한다. 하지만 종교적 믿음을 강요하는 광신도에게서 볼 수 있듯, 믿음을 강권하는 이들은 대체로 문제가 많다. 믿을 만한 인상을 줬다면 많은 이들이 알아서 따랐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며 협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사회를 염원하는 대통령께도, 국민들에게 함부로 믿음을 권하는 대신 스스로 불신의 시선을 갖추시길 권한다. 냉엄한 불신의 시선으로 정부의 구조적 문제를 고쳐간다면, 굳이 나서서 권하지 않아도 신뢰를 얻을 수 있으실 게다.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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