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남북한과 미국에서 새 정권이 출범한 지 1년 반~2년 반이 지나는 동안 핵 문제와 남북, 북-미 관계는 계속 나빠져 왔다. 적대 관계와 핵 문제가 상호작용하는 음의 되먹임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이런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임기 동안 새로운 기회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작잖다.
이제까지 행태를 보면 북한 정권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특성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북한은 우선 자존심이 세다. 생산능력이나 국토 크기 등으로 볼 때 작은 나라지만 김정은 정권은 자신의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일종의 과대망상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정권의 유전자가 그러니 쉽게 바뀌기가 어렵다.
또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권력이 공고하지 못하다. 그가 권력을 확실하게 다지려면 두 가지가 성공해야 한다. 하나는 경제 분야에서 뚜렷한 결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도는 줄기차다. 북한에는 지금 5개 경제특구와 19개 경제개발구가 있으며 경제개혁 조처도 잇달아 나온다. 그럼에도 성과는 크지 않아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주민의 불만이 높아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군부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다. 그가 틈만 나면 군부대를 찾는 까닭이다.
위의 두 요소가 결합해 극장국가라는 북한 체제의 체질이 더 강해지고 있다. 극장국가가 유지되려면 항상 자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나라 안팎에 과시해야 한다. 미사일·로켓 등을 계속 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북쪽은 남북 관계와 대미 관계를 잘 풀어야 하는 상황에 있다. 지난해부터 그런 뜻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체질까지 바꾸려 하지는 않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충족되고 권력 불안을 줄일 수 있다면 공격적인 대외 관계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 그 연장선에서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포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진다. 또한 남북 관계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북-미 관계가 크게 진전되거나 핵 협상이 본격화하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곧 남북 관계 진전이 핵 문제 해결의 전제는 아니더라도 필요조건 또는 촉매라고 할 수 있다.
남북 관계에서 시급한 것은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환경협력, 생활환경 개선, 생활공동체 형성 등을 북쪽에 제안했다. 앞서 3월 드레스덴 연설(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에서는 북쪽의 산모·유아에 대한 영양·보건 지원, 복합농촌단지 조성, 남·북·중 협력사업 등을 제시했다. 내용을 뜯어보면 모두 앞서가는 남쪽이 뒤처진 북쪽에 시혜를 베풀겠다는 내용이다. 조건도 달려 있다. 북쪽의 태도 변화와 핵 포기가 그것이다.
전임자인 이명박 정권은 ‘북쪽이 핵을 포기하면 1인당 소득을 3천달러까지 올리도록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비핵·개방·3000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선핵포기론의 비현실성은 제쳐놓더라도, 과거 선진국들이 저개발국에 대해 선별적인 지원을 하면서 제시했던 ‘성장 중심의 단선적인 근대화론’과 동일한 틀이다. 당시 여러 개도국은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지원을 받았으나 빈곤 퇴치조차 실패하고 경제구조가 왜곡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박 대통령 제안의 기본 인식도 다르지 않다. 선진국이 하위 개도국을 대하듯이 남북 관계를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제안으로 북쪽을 압박하는 것은 먼저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와 마찬가지다. 이미 남북 사이에는 기본 인식에서나 구체적인 프로젝트에서나 이들 제안보다 훨씬 앞선 합의가 있다. 10·4 정상회담 공동선언이 대표적이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낡은 개발 지원 방식을 뛰어넘는 ‘남북 상생 모델’의 표현이다.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는 그래서 중요하다. 상생 모델이 현실화할 수 있는 출발점이자 핵 문제 해결까지 이어지는 양의 되먹임 구조를 만들 지렛대이기 때문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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