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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실 국가를 개조하려면?

등록 2014-09-02 18:41수정 2014-09-02 21:02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세월호를 침몰하도록 한 것은 국가와 자본이라고 하지만,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분명히 ‘국가’다. 고물 선박 구입과 과적 운항 등을 저지른 것은 자본이었지만, 규제되지 않는 그 어떤 자본도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폭리를 노리는 행위를 할 것이다.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의 생리다. 자본의 이윤추구 본능을 공공이익을 위해 견제하고,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에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그리고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국가만이 할 수 있다. 세월호 사태가 보여준 것은, 대한민국이 그중에서 어떤 것도 못 한다는 점이었다. 이 국가가 유일하게 ‘효율적으로’ 할 줄 아는 것은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려는 유가족·시민들을 폭력적으로 막는 탄압 행위 정도다. 그러기에 세월호 사태가 제기한 궁극적 문제는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성격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거다. 이는 이론의 문제라면, 실천의 문제는 이와 같은 대한민국을 제대로 개조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부분이다.

사회과학적으로 본 근대국가는 궁극적으로 총자본의 총사무국이다. 그러나 총자본의 이해관계란, 꼭 개별 자본의 폭리 추구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개별 자본의 입장에서야 저과세가 제일 좋겠지만, 총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세금으로 제공해주는 의료·교육 무상화 혜택을 못 받으면 결국 내수시장에서의 구매력이 떨어져 자본도 덩달아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총자본으로서는 국가 ‘공공성’의 신화가 중요하다. 실제로 국가는 자본의 편에 서지만, 그래도 피치자들이 국가가 ‘불편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사회가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그 통치자들이 ‘공공이익’을 위하는 시늉마저도 못 할 수준이라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총자본과 다수의 노동자·서민 사이의 어떤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아 그저 각종 개별 자본을 위한 ‘해결사’ 노릇 하는 데 바쁠 뿐이다.

국가는 국민에게 기본적 정의도, 생존권 보장도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핵심 문제는 공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개별 자본의 ‘문제해결 전문업체’ 수준 이상 되지 못하는 부실 국가다

물론 대한민국의 지배자들은 위기 국면마다 민심 무마 차원에서 피치자들에게 각종의 양보들을 할 줄 안다. 유신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에 직면한 박정희는 1974년부터 고교 평준화를 실시하여 ‘기회 균등’의 신화를 공고화함으로써 유신국가의 위상을 다소 높였다. 물론 그렇다고 유신국가의 몰락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1987년의 대투쟁에 놀란 최후의 군부 통치자 노태우는 1989년에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제도를 적용시키는 등 ‘보편적 복지’를 시도해보는 척이라도 해주어야 했다.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김대중 정부는 늘어나는 빈곤의 문제에 직면하여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모양이라도 갖추어 복지예산을 늘려야 했다. 이와 같은 양보들은 밑으로부터의 피나는 투쟁의 대가로 얻어졌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국가는 비록 양보를 할 줄 안다 해도 과연 그 기본 성격을 바꾼 적은 있었던 것인가?

우선 국가에 대해 늘 기대되는 것은 ‘정의’다. 국가가 정말 ‘공공’기관이라면 자본가와 결탁하기가 너무나 쉬운 공직자 개개인의 너무나 뻔한 계급적 성향을 초월하여 다수의 통념상 ‘정의’로 여겨질 만한 사법·정치적 행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도 제정하지 못하고 유가족들을 계속 괴롭히기만 하는 국가는, 과연 평균적 한국인의 정의관에 부합되기라도 하는가? 관피아를 개조하겠다면서 자신을 포함한 관(官)의 책임을 사실상 면제하게 하는 대통령은 과연 정의와 어떤 관계라도 있는가? 세월호 참극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났지만 그 전에도 한국에서 국가는, 예컨대 자본가와 노동자들에게 같은 잣대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세금 포탈과 배임 행위, 주식 시장 불법 행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건희는 실형을 하루도 산 적이 없었다. 이건희뿐인가? 정몽구(현대기아차), 박용성·박용오·박용만(두산그룹 오너 일가) 관련 판례를 봐도 똑같은 패턴이 그대로 보인다.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횡령 등으로 유죄판결을 확정받아도 결국 집행유예로 사실상 실형을 면제받는 것이다. 반면에 ‘주인’들에게 반기를 든 노동자는 ‘몸’으로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자유주의 지향의 대통령일 때에 ‘불법 집회’나 ‘업무 방해’ 등으로 잡혀간 구속 노동자들의 수가 오히려 높아진다. 보수우파 김영삼 시절에 632명의 노동자들이 잡혀갔지만, 김대중 시절에는 892명, 노무현 시절에는 아예 1052명이나 됐다.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국민 상식(?)이 된 사회에서 국가가 제 노릇을 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밑으로부터의 압력밖에 방법이 없다. 정의도 생존도 건강도 노후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는 결국 피해자들에 의해서 그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배자들이 실감해야 비로소 지금보다 약간 더 살 만한 사회의 윤곽이 잡힐지 모른다

기본적 정의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는 그 국민들에게 생존권 보장도 해주지 못한다. 세월호 충격으로 세인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진 듯하지만 올해 2월의 서울 송파구 ‘세 모녀의 자살’은 김대중 이후에 가동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극단적 생활고로 결국 자살을 택한 가족의 어머니가 만약 식당일을 계속했을 경우 약 월 150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올해 수급 대상자 선정 기준인 3인가족 최저생계비(132만9118원)를 넘었을 것이고, 기초생활보장금을 신청해도 떨어졌을 것이다. 또 부양의무자, 즉 “생계를 달리하는 1촌 이내의 혈족과 그 배우자”가 있으면 신청이 거부되는 것이 바로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다. 이는 가난의 문제를 가족들에게 돌리는 책임 전가라고 하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는 기초생활보장급여 수급자보다 그 사각지대에 놓여 수급자도 되지 못하는 극빈 인구가 2.5배 더 많아 410만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총인구의 약 8%의 생계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하는 국가도 과연 국가인가? 이 국가는 무책임한데다 대단히 야박하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국가 복지정책의 주요 방향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 문제 등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부정수급자 적발’, 즉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의 강화다. 덕분에 2010년 155만여명이던 기초생활수급자는 2013년에 135만1000여명으로 줄었다. ‘치사하다’는 말밖에 달리 적합한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

정의도 생존도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보장된 것이 과연 무엇이 있기라도 한가? 건강권?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62%에 불과하며, 이는 노무현 정권 말기에 달성된 64% 보장성에 비해서도 후퇴다. 여러 가지 여론조사들의 결과를 종합해보면 약 30%의 한국인은 경제적 이유로 병원치료를 못 받거나 미룬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산업회된 사회에 비해서 한국의 의료체제가 보장성이 낮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후? 거의 노인인구 절반에 가까운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보다 거의 4배나 높아 “산업화된 나라 중의 최악”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에 서울시가 65살 이상 노인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27%나 아예 “소득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상당수 한국인들에게 노후는 ‘인생의 휴식’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악몽’에 가깝다. 어느 부문을 봐도 우리에게 보장돼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우리의 핵심 문제는 공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개별 자본의 ‘문제해결 전문업체’ 수준 이상 되지 못하는 부실 국가다. 이 국가는 다수에게 아무것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며, 특정 대기업들을 ‘뒷바라지’해주는 데 사회의 자원을 낭비할 뿐이다. 이 국가를 개조하자면? 결국 밑으로부터의 압력밖에 방법이 없다. 정의도 생존도 건강도 노후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국가는 결국 피해자들에 의해서 그 존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배자들이 실감해야 비로소 오늘날보다 약간 더 살 만한 사회의 윤곽이 잡힐지도 모른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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