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코스타리카 외교가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국내에서 인권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추구한다. 지난 5월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대통령궁에서 국기와 무지개 색깔의 게이 깃발을 함께 게양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였다.
한 나라의 힘, 즉 국력을 어떻게 평가할까. 흔히 인구, 국토 면적, 경제 수준, 군사력, 과학기술 발전, 환경관리 능력 등을 꼽는다. 정량적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중에서 경제력,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는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에 가까운 기준이다. 이른바 현실주의 이론으로 국제정치를 분석할 때 적합하다.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스탈린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발렌틴 베레시코프의 회고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이 만났다. 처칠이 설교를 시작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연합국인 미, 영, 소가 세계를 좌우하게 될 터인데, 그러려면 민주국가라는 점을 보일 필요가 있고 특히 이웃나라와 잘 지낸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소련은 폴란드한테 잘해줘야 한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이니 그래야 바티칸 교황청과도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로마 교황은 휘하에 몇개 사단이 있는가.” 고매한 천상의 논리를 설파하던 처칠을 스탈린이 지상으로 끌어내린 순간이었다. 스탈린의 국제관계 인식이 바로 전형적인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표현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국제정치를 치열한 국익 추구의 장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학계도 그렇지만 외교 현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선린우호니 세계평화니 하는 이상을 국제정치에서 실제로 추구하는 나라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이 질문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코스타리카를 꼽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싶다. 필자는 현재 코스타리카에 와서 가르치고 있다. 남북 아메리카의 정 중간에 있는 코스타리카는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아 국력이 큰 나라가 결코 아니다. 인구 470만에 우리나라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한 사이즈의 소국. 국내총생산(GDP)은 530억달러로 세계 81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달러가 조금 넘는 세계 68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군사력으로 치면 군대를 아예 없앤 나라이니 그 점은 언급할 수조차 없다.(군대 폐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한번 따로 쓸 생각이다.)
이처럼 코스타리카는 통상적인 평가로 따져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곳이다. 여기 사람들이 스스로를 ‘티코’라 부르듯 겉으로만 보면 아담하고 평범한 개발도상국이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 코스타리카의 영향력을 따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단순히 존재감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독특한 컬러의 존재감으로 자기 입지를 확실히 굳힌 남다른 국가다.
우선 코스타리카에는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관할하는 미주인권협정에 따른 국제기구인 미주인권재판소가 있다. 1979년 설립될 때 미국과 캐나다가 서로 유치하려 했지만 결국 코스타리카로 낙착되었다. 또 이곳엔 유엔평화대학이 있다. 유엔 총회에서 조약기구로 설립한 독특한 교육기관이다. 코스타리카는 외교 수완과 주도력도 뛰어나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실을 창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기록이 있다. 작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우리나라도 서명한 무기거래조약, 이것도 코스타리카가 큰 역할을 했다. 재래식 무기의 불법적이고 무분별한 이전을 규율하는 조약인데 비준국가 수가 늘고 있어 머잖아 발효될 것이 확실하다.
중남미의 역내 외교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중미를 휩쓸던 내전과 분쟁을 종식한 에스키풀라스 평화협정은 코스타리카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의 자유선거도 지원했다. 오스카르 아리아스 전 대통령은 그 공으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코스타리카는 또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의 연합체인 리우그룹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대변국 역할을 맡고 있다. 이달 초 집속탄금지 조약에 벨리즈가 비준함으로써 중미는 세계 최초로 집속탄을 전면금지한 지역이 되었다. 이 조약 역시 코스타리카가 열심히 중재해 성사시켰다. 프린스턴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물질적 국력보다 외교적 국력이 훨씬 큰 나라가 코스타리카다.
코스타리카의 인권·평화 외교는 기존의 국제관계 이론으로 설명이 잘 안된다. 국제관계를 무정부 상태로 보고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 논리로 설명하는 현실주의 이론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유주의 제도 이론도 딱 들어맞진 않는다. 이 이론에선 작은 나라들이 국제질서의 틀 안에서 주권을 인정받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수용되기를 원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국제법과 제도의 보호 아래 모여 있는 다소 수동적인 국가들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코스타리카는 국제적 제도들을 적극 활용하고 국제정치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것도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브랜드를 통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권력의 개념 자체를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코스타리카는 국가가 보유한 양적 개념으로서의 국력이 아니라, 실제로 행사하는 질적 개념으로서의 국력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질적 개념으로서의 국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크게 보아 두 요소가 있다. 첫째, 정치적·행정적 역량이다. 외교기술, 특정 영역의 지식과 축적된 경험, 그리고 이니셔티브를 취할 줄 아는 적극성이 그것이다. 둘째, 이미지와 평판이다. 이른바 능동적 규범 행위자로서의 정체성과 국제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는 스탠스를 말한다. 여기에 리더십, 동맹형성 능력, 우선순위 설정 능력이 추가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작은 나라가 이런 큰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코스타리카는 소국의 현실을 핸디캡이 아니라 자산으로 승화시킨 희귀한 케이스다. 이 나라의 인권외교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공자님 말씀’이 듣기엔 그럴듯해도 현실에서 그것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공자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행하는 사람이 동네에 산다면 어떻게 될까. 고지식하다고 비웃을 순 있어도 그의 행동을 나무라진 못할 것이다. 옳게 살지 말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그런 사람을 해코지하기도 어렵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의 공자님 말씀에 대놓고 반대하긴 더 어렵다. 어쨌든 맞는 말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간혹 그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고, 하도 졸라대니 귀찮아서라도 그가 하자는 대로 시늉을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시늉’들이 모이면 신기하게도 그게 힘을 발휘할 때가 온다. 자꾸 시늉을 하다 보면 구체적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자신이 한 시늉 때문에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것이 국제관계의 구성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규범의 구속력’이고 ‘인권규범의 연쇄증폭’이다. 공자님 말씀을 계속 실천해온 ‘착한 얼간이’ 코스타리카의 인권외교를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이론인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하드파워에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소프트파워가 결합하면 정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 인권을 수준 높게 실천하고 그것을 외교력으로 활용하면 된다. 멀리서 건배를 제안하고 싶다. 인권이 국력인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런데 모든 외교는 내치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아무리 대외적 영향력을 높이려 해도 국내에서 인권을 안 지키면 국제적으로 망신만 당할 뿐이다. 미국 국무부에서 아무리 인권외교를 편들 퍼거슨 인종갈등 사건 같은 것이 한번 터지면 체면에 먹칠을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이곳의 한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 한국의 군 인권 문제를 다룬 보도가 흘러나왔다.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전세계가 유리어항처럼 투명해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점에서 코스타리카의 외교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국내에서 인권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추구한다. 이 나라가 결코 완벽하지 않고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는 인권국가의 정체성이 뚜렷하다. 지난 5월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대통령궁에서 국기와 무지개 색깔의 게이 깃발을 함께 게양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였다.
산호세 시내에서 현대기아차를 자주 본다. 삼성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일일이 셀 수도 없다. 이렇듯 우리가 자랑하는 하드파워에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소프트파워가 결합하면 정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 인권을 수준 높게 실천하고 그것을 외교력으로 활용하면 된다. 멀리서 건배를 제안하고 싶다. 인권이 국력인 대한민국을, 위하여!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우리가 자랑하는 하드파워에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소프트파워가 결합하면 정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 인권을 수준 높게 실천하고 그것을 외교력으로 활용하면 된다. 멀리서 건배를 제안하고 싶다. 인권이 국력인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런데 모든 외교는 내치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아무리 대외적 영향력을 높이려 해도 국내에서 인권을 안 지키면 국제적으로 망신만 당할 뿐이다. 미국 국무부에서 아무리 인권외교를 편들 퍼거슨 인종갈등 사건 같은 것이 한번 터지면 체면에 먹칠을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이곳의 한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 한국의 군 인권 문제를 다룬 보도가 흘러나왔다.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전세계가 유리어항처럼 투명해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점에서 코스타리카의 외교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국내에서 인권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추구한다. 이 나라가 결코 완벽하지 않고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는 인권국가의 정체성이 뚜렷하다. 지난 5월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대통령궁에서 국기와 무지개 색깔의 게이 깃발을 함께 게양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였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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