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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 대학 강사의 죽음

등록 2014-10-28 18:53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국 학계의 비정규직 사정이 나쁜 이유 중 하나는 대학의 공공성이 약해서다. 학계 개별적 보스들의 권력이 학문적 객관성보다 우선이다. 정규직이 되려는 사람은, ‘진리 탐구’보다 먼저 편입의 관문을 통제하는 관리자들의 구미를 탐구해야 하고, 그 관리자의 의사(擬似) 가신이 되는 방법부터 탐구해야 한다.

고졸자 대부분이 대학을 들어가는 시대다. 대학의 암흑적 이면에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 차별·예속·착취에 시달리는 대학 비정규직들과 연대해 그들이 살아서, 투쟁을 통해 그 인간적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한 지방도시에서 한 여성이 한국사를 전공했다. 관심사가 다양해, 정치사부터 음식이나 복식의 역사까지, 폭넓게 연구활동을 벌여 학술논문도 대중교양적 성격의 글도 썼다. 물론 박사학위 소지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에게는 두가지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 지배층의 언어인 영어가 아닌 평민의 언어, 즉 한국어로 학술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 땅에서 한국사를 같은 한국인에게 가르친다 해도, 상전 국가의 말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검증된 사람, 즉 영미권 중심의 학술시스템에 편입된 사람이 아닌 이상, 대학교원으로 임용이 어려운 게 이 나라의 현주소다. 두번째는 지방대를 나온 현대판 천민으로서, 그에게 유일한 정규직 취업 가능성은 그 출신 대학으로의 취직이었다. 간판이 ‘자유민주주의’인 대한민국은 국민들에게 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지만, 이는 실질적으로는 학계의 불가촉천민이라고 할 지방대 출신들에게 그대로 해당되지 않는다. 운 좋게 외국에 ‘학술 망명’하여 거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상, 그들을 반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그들의 출신 학교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출신 학교의 사학계 권위자는 그의 약점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아무리 부려먹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비정규직으로 취직시켜 고되게 착취했다. 그는 일단 꾹 참았다. 언젠가 정규직이 될 희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어도 못하는 지방대 출신’을 인정할 수 있는 곳이 그 모교 말고 어디도 없었다는 것도 아주 컸다. 타자로부터 인정받지 않으면 과연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고 사는 것은 가능할까? 하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취직은 제일 큰 문제였다. 그는 자신을 부려온 권위자가 퇴임 이후 자신을 후임으로 뽑을 것을 기대했다. 계속해서 “챙겨주겠다”고 약속해온 그를 일단 믿어본 것이다.

그러나 보스가 아랫사람을 착취하는 만큼 그 미래까지 챙겨야 했던 온정주의적 개발국가 시대는 이미 지났다. 신자유주의 모범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그 어떤 언약도 그저 이익추구의 도구에 불과하며, ‘갑’에게 불리하기만 하면 바로 파기된다. 그 역시 그 ‘갑’에게 속고 말았다. 실제 후임으로 뽑힌 사람은 별다른 업적은 없었지만, 권위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울대 출신으로 사학계의 ‘성골’이라고 할 인물이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대학이라는 이름의 착취공장에서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불안노동 속의 착취와 궁극적인 폐기처리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 ‘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같이 연대해서 투쟁하기에는 대학 비정규직들은 너무나 원자화돼 있다. 살인적 업적 경쟁으로 각종 사적인 관계망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대학의 현실 속에서 비정규직들에게 연대란 대단히 어려운 이상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피곤했다. 착취와 멸시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채점을 마치고 나서다. 그 자살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려 했던 권위자는 그를 ‘정신 이상자’라고 사후에 규정했다. 아무리 비극적으로 죽어도, 상아탑의 천민은 죽고 나서도 계속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며칠 전에 어떤 지인으로부터 위와 같은 대학 비정규직 자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슬픔과 함께 어떤 절망감 같은 것을 느꼈다. 사실 상아탑을 받쳐주는 ‘을’들의 죽음의 행렬은, 1997~98년의 외환위기 직후부터 시작됐으니 어제오늘의 소식만도 아니다. 아직도 학문의 세계를 고상하게 상상하는 선남선녀들은, 정규직 임용이라는 하늘의 별 따기 이상으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학자는 그저 무한 ‘갑질’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나서는 늘 새삼스럽게 놀라곤 한다. 가끔 노예의 삶에 지쳐 죽음을 택한 또 한명의 피해자 유서가 일반인들로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학의 추악한 이면을 공개할 때 사회는 크게 경악했다. 4년 전, 조선대에서 13년이나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해온 서정민 박사(음운론)가 자살했다. 그의 유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그의 지도교수가 정규직 임용을 미끼로 그로 하여금 54편이나 되는 논문을 대필하게 하는 등 문자 그대로 ‘논문제작 기계’ 삼아 이용해왔다는 것이다. 서정민 박사가 “나는 노예가 아니다”, “한국 대학사회가 증오스럽다”고 외치면서 저세상으로 떠났고, 유족들은 학교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물론 학교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으며 논문 대필 의혹 등에 대해서 들려온 대답은 “학계의 관행”일 뿐이었다. 그리고 ‘서정민 유서’가 한때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정규직 임용권을 손에 쥐고 있는 ‘갑’들은 여전히 ‘을’들을 노비처럼 부리고, 절망 끝에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상아탑에 꽤 많은 것이다.

저임금 등에 신음하는 ‘학계 무산계급’은 신자유주의적 세계 어디에도 다 있다. 2007년 조사를 보면, 미국 대학들의 교원 70%가 비정규직이었으며 그들은 평균 1년에 2만달러 정도의 임금을 받는 등 ‘워킹 푸어’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비정규직 사정이 훨씬 나쁜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 대학의 공공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재벌들의 사익을 보장해주는, 개별 자본들의 ‘해결사’에 불과하듯이 학계도 마찬가지로 개별적 보스들의 권력이 학문적 객관성보다 우선이다. 미국에서도 가끔가다 학계에서 정규직 임용 절차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한국은 아예 그 임용이 공정할 수 있다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기에 상아탑의 사회에 편입하려는 사람은, ‘진리 탐구’보다 먼저 그 편입의 관문을 통제하는 관리자들의 구미를 탐구해야 하고, 그 관리자의 의사(擬似) 가신이 되는 방법부터 탐구해야 한다. 가신에게는 거절의 권리라고는 없다. 논문 대필 등은 연구실적에 대한 허위 보고, 즉 엄연히 이야기하면 범죄에 속하지만, 대필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보자를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보복하는 마피아적 성격의 폐쇄된 카르텔인 학계의 성격상 대필에 대한 고발을 자살 등으로 죽기 직전이 아니면 하기가 어렵다. 살아서는, 그 고발에 대한 보복을 당하는 게 학계에 계속 종사하려는 개인으로서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한국 학계의 모든 폐단들을 한 몸으로 다 보여준 어떤 ‘교육학 대가’가 박근혜 정권에 의해서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될 뻔했을 때에 그 대필 강요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범죄의 사실을 <한겨레>를 통해 밝혀 그가 장관에 임명되는 참사를 예방하는 데 일조했을 때 나는 내심 무척 기뻤다. 죽지 않고서 자신이 대필 강요의 피해자임을 밝히는 게 이 나라 학계 관례상 보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학계에서 신자유주의란 지방대 출신에 대한 차별과 개인적 시혜·수혜 관계, 폐쇄된 소(小)사회에서의 매우 폭력적인 사적인 예속 등과 같은 전통·식민지·권위주의 시대 유산과 불안노동·무한경쟁이라는 후기자본주의적 현상들의 중첩을 의미한다. 근대적 공공성을 대신하는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전통’들은, 신자유주의적 착취공장이 된 대학에서의 ‘월화수목금금금’과 같은 방식으로 보스들에게 저임금이나 무보수로 초과 착취를 당할 무권리 노동력의 공급을 보장해준다. 폭력적 과거와 초자본주의적 현재의 겹침은, 죽음이 아니면 저항 방법이 거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의 보이지 않는 괴물적 한국 학계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고졸자가 대학을 들어가는 시대다. 대학의 이런 암흑적 이면에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 차별·예속·착취에 시달리는 대학 비정규직들과 연대해서 그들이 살아서, 투쟁을 통해 그 인간적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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