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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인문학 바람 속에 죽어가는 인문학 / 고명섭

등록 2014-10-30 18:41

고명섭 논설위원
고명섭 논설위원
기원전 5세기 시라쿠사에 살았던 코락스는 수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코락스는 변론 기술을 잘 가르치기로 유명했는데, 어느 날 젊은이가 찾아와 첫 번째 소송에서 이기게 해준다면 수업료를 얼마로 정하든 다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변론술을 익힌 젊은이가 수업료 내기를 거부했다. 소송까지 간 두 사람은 함께 법정에 섰다. 코락스는 소송에서 이기면 당연히 수업료를 받아야 하고, 지더라도 제자가 첫 번째 소송에서 이겼으므로 역시 수업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젊은이가 똑같은 논리로 맞섰다. 자기가 이기면 이겼으니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고, 지게 되면 첫 소송에서 이긴다는 조건을 위배한 것이므로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배심원들은 스승과 제자를 “그 까마귀(코락스의 말뜻)에 그 새끼”라며 법정에서 내쫓았다.

아테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코락스의 일화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구름>의 주인공은 전차 경주에 미친 아들을 뒷바라지하다 파산할 지경에 이른다. 빚을 갚지 않고 빚쟁이를 물리칠 방법을 고민하던 이 남자는 소크라테스가 교묘한 변론술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아들을 보내 배워오게 한다. 아들이 궤변을 부려 빚쟁이를 따돌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버지를 패면서도 그것이 옳다는 논증까지 한다. 화가 난 아버지는 소크라테스의 강의실에 불을 지른다. 이 희극은 부당한 공격의 대표적인 사례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피스트의 변론술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싸잡아 비난했으나, 실상 소크라테스가 한 일은 소피스트들의 영혼 없는 기술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써 물으려고 한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바로 거기서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인 인문학이 발원했다.(안재원 <인문의 재발견>)

우리의 인문학이 처한 상황을 보면 소크라테스와 코락스 사이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꼴이다. 한편에선 인문학 위기가 심해지고 다른 한편에선 인문학 바람이 분다. 인문학의 전당이라 할 대학에서 인문학이 죽어간다. 폐과가 속출하고 학생이 줄고 그나마 있는 학과는 실적 쌓기용 논문 쓰기나 국적 없는 영어 강의로 피폐해져 간다. 대학의 그런 사정과 달리 대학 바깥에서는 인문학 바람소리가 높다. 그 바람에는 삶의 현장에서 부는 좋은 바람도 있지만, 기업과 기관이 일으키는 기이한 바람도 있다. 대학의 인문학은 자본과 기업의 논리에 포획돼 사멸해 가는데, 대학 바깥에서는 그 자본과 기업이 인문학과 경영, 인문학과 창조의 결합을 외치며 풀무질을 한다. 인간다움을 성찰하는 인문학의 정신을 내쫓고 처세의 방편, 실용적 기술의 인문학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인문학 현실이다.

그러나 처세와 기술의 인문학은 엄밀히 말하면 인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인문학에는 어떻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인가, 어떤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인가를 묻는 물음이 없다. 그런 물음은 지배관념을 흔드는 불온한 물음이기 십상이다. 이 불온한 물음이 우리의 이해와 공감의 능력을 키워주고, 조작과 선동에 맞서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시민을 키워낸다.(파커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인문학의 심장에 들어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불온함이다. 그 불온함이 사회의 부패를 막는다. 인문학은 방부제이고 항체이며 사회의 활력을 키워주는 힘이다. 묻고 따지고 결을 거스르는 인문학의 그 비판과 성찰의 정신이 되살아나야 한다. 대학을 기업과 자본의 손아귀에서 되찾아야 한다. 인문학이 죽은 대학은 대학으로서도 죽은 것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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