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을 흔히 갈등과 대립의 틀로만 바라보는 이들한테 10월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은 신선한 느낌을 줄 만했다. 이날 교황은 진화와 우주 대폭발(빅뱅) 이론이 하느님의 존재에 반하지 않는다면서 ‘창세기를 읽으며 하느님을 마법지팡이 든 마법사처럼 상상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연설이 하느님을 부정하는 게 아님은 당연했고 오히려 하느님의 창조가 있어 진화와 빅뱅이 가능했다고 강조해 그 존재를 드높였다.
사실, 교황이 직접 진화와 빅뱅 이론을 인정하는 태도를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교황 비오 12세가 빅뱅 우주론을 인정하면서 종교의 가치를 설파한 것이 반세기 훨씬 전인 1951년 연설이었다. 다음날인 11월23일치 <뉴욕 타임스>는 비오 12세의 연설을 1면에 크게 보도했다. 연설 전문이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또 다른 이름과 마주친다. ‘교황청 과학원’.
언뜻 과학원이 교황청 교리의 방패막이처럼 오해를 받을 법하지만 그 역사와 전통은 만만찮다. 먼저 세계 각지의 저명한 과학자 80명이 과학원 진용을 이룬다.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과학원의 현 대표이며, 스티븐 호킹과 야마나카 신야도 일원이다. 17세기 갈릴레오가 활약했던 린체이 아카데미의 전통을 이어받아 19세기에 재건했다는 과학원을 거쳐 간 노벨상 수상자만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70여명에 달한다.
‘교황청 지원을 받되 독립 연구기관으로 존립한다’는 규정도 눈에 띈다. 역대 교황이 과학원에서 행한 연설이 그저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 과학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다루며 열린 태도를 보여준 것은 과학원의 전통 덕분이었을 것이다. 진화와 우주론,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등의 주제에 관해 역대 교황들이 1917~2002년 과학원에서 행한 연설문의 모음 책자를 누리집(goo.gl/4arHnd)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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