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중국 고대의 사상가인 순자는 유가 사상을 현실의 예와 경험에 맞도록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문화나 예의가 시대에 따라 변하더라도 그 이치는 바뀌지 않는다고 봤다. 다양한 변화에 응용되는 이 이치가 통류(統類)다. 그가 구분한 유(儒, 지식인·정치인·관료)는 통류와 관련한 역량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속유(俗儒·속물적 유)는 통류를 알지 못하고 세태에 따라 이익을 추구한다. 그다음 아유(雅儒·고지식한 유)는 제도·예의를 알고 언행이 법도에 맞지만 새로운 상황에 응용할 줄 모른다. 반면 대유(大儒·막힘없는 유)는 들어보지 않은 일이 갑자기 일어나더라도 능숙하고 정확하게 통류로 대처한다.
박근혜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은 어디에 속할까? 최근의 몇 가지 일을 살펴보자.
10만여명의 장병을 거느리는 육군 대장이 강연을 위해 모교를 방문했다가 동문과 소주 2병을 마셨다. 그가 취한 모습으로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갔다 오는 모습을 보고 한 시민이 신고를 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은 구두경고를 하고 이 사안을 일단락했다. 하지만 두 달여 뒤 국회에서 이 일이 거론되고 언론에 보도되자 박 대통령은 ‘전역 조처를 하라’고 했다. 이 대장은 며칠 뒤인 9월 초 군복을 벗었고, 국방부는 그의 ‘음주 추태’를 자세하게 밝혔다. 그런데 국방부가 뒤늦게 진상조사를 해보니 앞서 공개된 내용은 여러 대목에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의 한마디’와 군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4성장군의 40년 군 생활이 끝나버린 모양새다.
경기도 김포시 최전방의 애기봉 등탑 철거 문제도 진행 과정이 비슷하다. 관할 해병대의 지휘관은 안전 문제가 제기된 이 등탑을 국방부 쪽과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10월 중순 철거했다. 그가 곧 다른 보직으로 옮길 예정이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한 셈이다. 하지만 철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박 대통령은 청와대 회의에서 이를 질책했다. 이후 정부는 경위 조사에 나섰고, 국방장관은 국회에서 철거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역시 ‘대통령의 한마디’에 맞춘 소동이다.
이런 양상은 대북 전단 살포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정부는 애초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면서도 탈북자 단체 등에 전단 살포 자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제재 불가’를 밝힌 대통령의 한마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뒤부터 정부는 ‘전단 살포를 규제할 근거법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반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재연기 문제에서는 마땅히 대국민 설명에 나서야 할 군 최고 통수권자(대통령)는 뒤로 빠진 채 각료들만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쏟아낸다.
여러 사례에서 박 대통령이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엄격한 위계질서다. 자신의 지시는 신속하게 집행돼야 하고 누구든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 권력 누수로 비칠 수 있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준거집단으로 설정한 보수층의 동향이다. 그 가운데 핵심은 박정희 정권 때까지 맥이 닿는 안보보수파다. 이들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존은 갈수록 더 커지는 듯하다.
박 대통령은 어떤 일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벗어나면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위 공직자들을 의심하고 압박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신경증에 가까운 모습이다. 되풀이되는 ‘한마디’는 그 표현이다. 더 큰 문제는 고위 공직자들의 태도다. 이들은 이제 대통령 언행의 숨은 뜻까지 헤아려 그에 맞추려 한다. 인사와 정책이 꼬이지 않을 수 없다. ‘신경증 대통령, 속유(속물) 각료 시대’라고 할 만하다.
순자는 말한다. ‘속유가 나라를 이끌면 만승지국(대국)이 겨우 보존되고, 아유가 주도하면 천승지국(제후국·소국)이 안정된다. 대유가 활동하면 사방 백리의 땅(최소국)이 오래 보존되고 3년이 지나면 천하가 통일되며 제후들은 그의 신하가 된다. 만약 대유가 만승지국에서 나선다면 짧은 시간에 천하가 평정된다.’
예나 지금이나 고위 공직자의 수준과 행동은 나라의 앞날을 좌우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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